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412
청주지< 淸州誌 > 불우조< 佛宇條 >에 "욱장암< 욱章庵 > 재화양동< 在華陽洞 >(금전채운암< 今傳彩雲庵 >)"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조정< 朝鮮 英祖朝庭 >에 배향된 민진원< 閔鎭遠 >의 단암만록< 丹巖慢錄 >에 "숙종조< 肅宗朝 >의 상신< 相臣 > 민정중< 閔鼎重 >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황실의 유물< 遺物 >을 수집하였는데 숭정의종황제< 崇禎毅宗皇帝 >의 어필< 御筆 > 「비례부동< 非禮不動 >」의 휘호를 가지고 온 자가 있어 값을 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가버렸다. 민정중< 閔鼎重 >이 이 글씨를 가지고 귀국하자 거유< 巨儒 > 송시열< 宋時烈 >이 화양동에서 이 글씨를 큰 암벽에 글자를 새기고 그 옆에 중을 모아 암자< 庵子 >를 이룩하여 그 이름을 욱장사< 욱章寺 >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괴산군지에 "욱장사 대웅전< 욱章寺 大雄殿 > 옆에 명나라 신종황후< 神宗皇后 >의 초상을 봉안한 소전각< 小殿閣 >이 있으며, 그 옆에 장판각< 藏板閣 >이 있어 정조< 正祖 >가 조신< 朝臣 >에게 명하여 각공< 刻工 >으로 하여금 조각케 한 「송자대전< 宋子大全 >」,「정서분류< 程書分類 >」 102권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었다. 또 대웅전 서편에 '팔음각< 八音閣 >' 이라는 것이 있어 이 속에 다듬이돌 모양의 8개의 돌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조선팔도에서 모아 들인 것으로서 두드리면 고저청탁< 高低淸濁 >의 음이 각각 다른 팔음< 八音 >의 소리가 났다.(한편 팔음석< 八音石 >이라고도 함)그러나 1896년(고종 33)에 국내 각처에 의병이 봉기할 때 일본관헌이 난입하여 불을 지르니 욱장사< 욱章寺 >는 소실되고 말았다. 이 때 대웅전 3칸만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채운암은 본래 화양천 건너편 첨성대 안쪽 계곡에 1277년(고려 충렬왕 3년) 도일선사< 道一禪師 >가 창건하여 수도암이라 하였고, 그 후 1619년(조선 광해군 2년) 혜식선사< 慧識禪師 >가 중건< 重建 >하고 채운암< 彩雲庵 >이라 하였다. 현 위치에는 1655년(효종 4년) 혜일선사가 절을 짓고 욱장사를 창건하였다. 한말 왜병의 침입으로 대부분 불타고 1948년 대홍수시 채운암이 파괴되자 1949년 그 요사 일부를 현 위치에 이전하고 채운암이라 부른다. 중수< 重修 >시 묵서명< 墨書銘 >에 "도광육년병술< 道光六年丙戌 >"(1826)의 상량< 上樑 > 기록이 발견되었다. 채운암 대웅전은 현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인 채운암 목조여래좌상< 彩雲庵 木造如來坐像 >의 법당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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