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전역
인류의 원시적인 호신술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서 漢書 』< 무제기 武帝紀 >에 이 각저희< 角抵戱 >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벽화의 무용총< 舞踊塚 >과 삼실총< 三室塚 >에 두 사람이 서서 손을 서로 앞에 내밀고 싸우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택견으로 보여진다. 이런 기예는 북방민족에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벽화의 그림은 이것이 경기 종목으로 등장하였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현재에도 평안도 사람이 소위 박치기를 잘하는데 고구려의 전통으로 민속에 남아 있는 택견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이 택견은 조선시대에도 한량< 閑良 > 액정패들이 전승하고 무희< 武戱 >로서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그림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문헌에는 수박< 手拍 >수박< 手博 >수벽타< 手癖打 > 등의 기록도 보이나 오늘의 택견과는 다르다. 택견은 발을 많이 쓰고 있으며 주먹을 쥐지 않고 손을 편 채로 춤에 가까운 동작으로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헌에 보이는 탁견< 托肩 > 각희< 脚戱 >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근세에 서울 주변에는 택견을 하는 패들이 많이 있어서 성< 城 > 안에 사는 패를 윗대패라 부르고 성 밖에 사는 패를 아랫대패라 불렀다. 같은 성내< 城內 >패라 할지라도 대궐에 가까운 쪽의 패를 다시 윗대패라 이르고 대궐에서 먼 변두리 패를 아랫대패라 하였으니 대궐에 가깝다는 데에서 상당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윗대패의 한 사람으로는 송덕기< 宋德基 1893년생 >가 있었으나, 몇 년 전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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