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905
방촌은 조선시대 유명한 정승 황희(黃喜/1363~1452)의 호이다.
이 영정은 1474년(세종 6) 황희의 나이 62세 때의 초상이다.
원래는 경북 상주군 모동 수봉리에 위치한 옥동 서원에 봉안되었는바 상주의 황씨 종인이 1844년 복제하여 나누어 받아 화산서원 관리인이 보관해 오다가 1927년 화산서원이 건립되자 화산서원에 보관하였다.
작자는 미상이나 견본<絹本>(54㎝ x 80㎝)에 진채<眞彩>로 그려졌으며, 진품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어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다.
홍여하<洪汝河>(1621∼1678)가 방촌황공<방村黃公>의 영정에 찬<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소 집에 있을때는 그저 온화하여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수염을 잡아 당기며 안아 달라고 하거나 먹을 것을 내라고 조르기를 마치 아이가 제 부모를 조르듯 해도, 내버려 두다가 궁복<宮服>차림에 홀<笏>을 꽂고 묘당<廟堂>에 나서면 여러 관료가 쩔쩔매고 조정이 숙연해 지기를 마치 명문가의 자제가 그 부형<父兄>을 경외하듯 하였다. 비유하건대 신용<神龍>이 못속에 숨고 수렁에 서려 있을 때에는, 자라나 도마뱀 따위의 업신여김을 받다가도 한 번 변화하면 비바람과 벼락을 일으켜 산곡<山谷>을 진동시키고, 하해<河海>를 뒤집어 도리어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별로 두드러진 바가 없는 듯 하였으나, 지금 300년이 지난 뒤에는 부녀와 어린애까지 그 유풍<遺風>을 그리워하며, 그 성명을 외우고 있다. 이로써 본다면 그 위엄을 목격하며, 그 의논을 듣고도 오히려 그 지닌 바를 다 알지 못하것을, 하물며 이 한 폭의 영정을 보고 그 평생을 어떻게 조금이나마 상상해 낼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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