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391-5
통일신라 초기의 5층 모전석탑(五層 模塼石塔)으로 높이 11.3m. 영양지방에는 현재 모전석탑 3기, 일반석탑 7기가 남아있어 육지내의 섬이라 불리우는 이곳에 어떤 연고이던 탑이 많이 건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봉감모전 5층석탑은 크기도 장대할 뿐 아니라 2층 이상의 옥신(屋身, 몸돌)에 별석을 끼운 것 같은 특이한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어 주목이 된다.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지표에 토석(土石)을 혼용하여 단층의 기단을 축조하고 그 가운데 굵고 큰 자연석으로 탑신굄을 만든 다음, 탑신부(塔身部)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전석재를 이용하여 2단의 탑신 받침을 쌓고, 그 위로 높이 11m에 이르는 5층 모전석탑을 쌓았다. 탑신받침을 비롯한 탑신부는 옥신(屋身, 몸돌)과 옥개(屋蓋) 모두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비교적 두껍고 잘 다듬어져 있으나 크기는 고르지 않다. 1층 옥신은 18단으로 쌓았는데 높이 2.30m, 너비3.26m로 가장 크고, 2층 이상은 알맞은 비율로 차례로 체감되었다. 1층 옥신의 남면에 높이 1.0m, 폭0.85m, 깊이 1.49m에 이르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좌우의 문기둥(柱形)과 위의 이맛돌을 화강석으로 깎아 끼웠으며 하방석(下枋石)은 따로 두지 않았다. 1층 옥개석(지붕돌)은 모두 13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붕 밑면을 기준으로8번째 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지붕받침)은 7단, 윗면(낙수면)은 5단으로 되어 상하에 층단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지붕받침돌(옥개받침)은 윗층으로 올라가면서 그 수가 줄어들어 1층에는 7단, 2층은 6단, 3, 4, 5층은 각각 5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특히 2층 이상의 옥신부는 각 층마다 중간 위치에 모전석재 1단을 약간 넓게 돌출하여 턱을 두어 수평띠를 둘렀는데, 그 아래쪽은 같은 석질이되 가공하지 않은 크고 작은 돌로 자유롭게 쌓고 그 위쪽은 모전 석재로 차곡차곡 쌓았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은 옥신의 상하가 다른 모양으로 되어, 다른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으로 마치 고려시대 석탑에서 보여지는 옥신 밑에 별석(別石)을 삽입하였던 양식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이 중간의 턱(別石)으로 인해 옥신석의 상하의 높이는 같으나 너비는 상단이 약간 좁은 점으로 보아도 별석 굄의 뜻이 나타나 있는듯 하다. 옥개부(屋蓋部, 지붕돌)는 전탑의 형식을 따라 추녀의 너비가 좁아졌고 상하에는 모두 층단받침이 있다. 이 탑의 1층 옥신 남면에 있는 감실의 이맛돌에는 '天王門', 문기둥에는 '四大菩薩家'라고 새겨져 있고 감실내에는 부처를 모신 듯 하다.
마을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왕문 등의 글씨는, 임진왜란 직전 이 절 주지로 있었던 서모(徐某) 대사(大師)라는 고승의 자필이라하며 감실에 모셔졌던 영험많은 석불을 탐낸 이웃마을(신구리?)에서 완력으로 빼앗아 가 버렸다고 한다. 한편 감실의 석불을 빼앗긴 고승은 통곡하면서 이 절을 떠난 후 영영 소식이 없었다고 하며, 이 탑 동북방 약 3km 지점의 신구리(新邱里, 일명 탑구리, 탑두들)에는 3층석탑(지방문화재 자료 제84호)이 있고 그 앞에 석불 1구가 놓였는데 이 불상이 원래 봉감 탑 감실에 있었던 것이라 전한다. 흥미로운 것인 이 석불과 감실은 크기와 규모 등이 알맞게 일치하여 주민들 얘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탑은 원래 5층 옥신부까지만 남아 있었고 그 위 부분은 결실(缺失)되어 버렸는데 1988년 10월 8일, 해체 수리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때 탑의 주변에서 상륜부 목심주초석(木心柱礎石, 탑의 상륜부의 중심을 잡는 나무기둥을 지탱하는 주춧돌)을 찾아냈고 탑 안에서도 사리구를 보관하던 석함일부를 발견하였다. 아마 과거 어느때인가도 붕괴 또는 해체되어 수리하면서 탑 안에 모셨던 사리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깨진 사리구 석함(石函)만 탑안을 채우는 잡석과 함께 묻어버린 듯 하다. 해체 복원 직전까지 이 탑 각층의 옥개석 네 모서리 끝에 지름 1cm의 풍경공(風磬孔)이 있었고 동북방의 2층 옥개석 낙수면에 조탑 당시의 기와 3매, 3층 동일위치에도 2매, 모두 5매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창건 당시 목탑형식을 모방하여 각 층의 낙수면에는 기와가 입혀졌고, 각층 옥개석 네 귀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던 화려한 전탑임을 상상케 한다.
목탑(木塔), 전탑(塼塔), 석탑(石塔)으로 이어지는 발전 과정에서 이 탑은 목탑번안(木塔飜案)의 대표적인 작품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산령에서 흐르는 동산천이 낙동강 상류의 반변천(半邊川)과 만나 크게 또아리를 틀어 태극문양처럼 반원을 그리며 흐르면서 수려한 풍광을 자아내는 마을 한 가운데 우뚝서서 당당한 위엄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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