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52-1
박흥생(1394-1446)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자는 경부<敬夫>요 호는 국당<菊堂>이다. 관향이 밀양으로 태종때 대제학을 지낸 문간공 박시용<朴時庸>이 영동으로 이거하고부터 이 고장의 토성이 되었다. 국당은 문간공의 손자이다. 그는 상촌<桑村> 김자수의 문인으로서 종제인 난계 박연, 이요당<二樂堂> 박순의 행직(행직)과 학문이 '삼선생 문집'속에 그 사실<史實>이 전한다. 그는 세종 때 1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17세 때 생원이 되어 여주·춘천의 교수로 벼슬을 시작하여 1423년 창평현감을 역임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여 벼슬이 떨어진 인물이다. 지금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초혼각<招魂閣>에 생육신<生六臣>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그리고 1424년 친상을 당하자 삼년 시묘의 효자로서 왕명에 의하여 정려각이 세워졌다. 그의 학문과 충절과 효심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683년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비문을 짓고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선생께서 글을 쓰시어 묘비를 세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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