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1∼2리 318
석천서당은 이 마을 전면에 위치하며, 마을 앞에는 석벽(石壁)이 병풍같이 둘러져 있고 그앞으로 맑은 내가 흘러 석보(石保)라 칭하고 있다. 옛날에 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원리(院里)라고 불리고 있으며 뒤에는 산이 세겹을 이루어 중대, 동대, 서대로 불리고 있다.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 ∼ 1674)은 1612년(광해 4)에 소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혼탁한 정치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것에 비분강해(悲憤慷慨)하여 1640년(인조 18, 庚辰)에 여러 아들과 같이 영해로부터 이곳 석보에 와서 중대(中臺) 위에 터를 잡고 그 거소(居所)를 석계초당(石溪草堂)이라 하여 벼슬에도 나가지 않고 14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영해로부터 이곳에 이주할 때 여러아들(四子)이 모두 경학(經學)과 문장이 뛰어나고 행실이 착하여 일세에 명성이 높아 널리 알려졌고, 더욱이 석계 선생은 문장과 행의(行義)와 기절(氣節)이 당시의 사표(師表)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석계는 20년간 수비산에서 은거하다가 1674년 안동에서 운명하니, 1676년(숙종 2년, 庚辰) 상을 마친 넷째아들 항제 이숭일(恒齊 李嵩逸, 1631 ∼ 1698)이 그의 모친 장씨부인과 함께 돌아와 선업(先業)을 이어오다가, 부친 유고후 그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어 1762년(영조 38, 壬午)에 자손들이 일부 유림(儒林)들과 초당(草堂)을 중건하여 석천서당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1770년(영주 46)에 기공하여 1771년에 준공하였으며 그후 189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석천서당에는 「석천서당기」, 「수산수진수창(首山粹辰酬唱)」, 「석계기(石溪記)」, 「과석계 유허유감(過石溪 遺墟有感)」, 「갈암차운(葛庵次韻)」, 「석천서당 중수기」등이 있다.
석계초당에 걸린 시편「暮歸石溪途中作」을 옮긴다.
日 暮歸來路轉幽 蜀開嚴使人愁
處盧何處柴門掩 雲麓盤回石水頭
석양녘 귀로길 어둡기만 한데
蜀으로 가는 길 더욱 깊고 험하니 수심만 이누나
띠집은 어디멘가 사립문 닫혀있고
구름 덮힌 산 기숡만 석계물가에 빙둘렀네.
또한 서당고(書堂庫)에는 「안릉세전(安陵世典)」, 「석계산생문집(石溪先生文集)」,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貞夫人 安東張氏 實技)」, 「정묵재선생 문집(靜默齊先生 文集)」,「항재선생 문집(恒齊先生 文集)」 ,「냉천집(冷泉集)」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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