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 205-1
월담헌과 사월종택이 있는 하원리(下元里)는 한양조씨들의 동족마을이다. 이 집은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사월 조임(沙月 趙任, 1573 ∼ 1644)의 살림집으로 조임이 나이 30세 때인 선조 35년(1602)에 지은 것이라 전한다.
이 건물은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누각을 주 건물로 하여 정침을 ㅁ자형으로 배치시킨 매우 희귀한 예이면서 정남향을 하고 있다. 개인 주택방위를 자좌오향(子坐午向, 正南向)으로 잡은 예는 궁중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특이한 경우이다. 원래 이집은 日자형에 가까운 배치형태로서 제청(祭廳)과 문간채가 따로 있었으나 제청은 일찍이 없어졌고 문간채는 40여년전 쯤 퇴락하여 철거하여 버렸다는데, 지금은 남쪽으로 뚫린 ㄷ자형 정침(正寢)과 ㄴ자를 좌우로 뒤집은 모양의 사랑채인 월담헌(月潭軒)이 연결되어 집 모양은 옆으로 누운 尸자형을 이루고 있다. 워낙 높은 곳에 지은 집이라서 중문 앞에서부터 안채 대청까지 상당히 가파른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마당에는 월대를 설치하여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다.
사랑채인 월담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ㄱ자형 높은 누사형(樓謝形)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ㄷ자형 맞배지붕으로 정침의 대청가구는 5량가이다. 높은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하므로 안채보다 높은 용마루를 지녀 이 집 주인의 기품을 돋보이게 설계된 사랑채는 동쪽에 4칸의 대청마루를 누각형으로 만들었다. 대청마루에 연결된 사랑방은 2칸으로 남북으로 놓여있고 사랑방 북쪽으로 신주(神主)를 모신 신주방(감실방)을 두었는데, 신주방을 둔 경우도 특이하지만 신주방 신주가 사랑방 그리고 대청들이 동쪽으로 돌출되어 밖에서 보면 다른 건물인 양 착각된다. 대청과 사랑방 앞에는 퇴를 내어 툇마루를 설치하여 공간을 넓혔다.
누마루 밑의 기둥 4개는 자연석 주춧돌에 그랭이질 하여 한껏 멋을 내어 세웠다. 중문 오른쪽은 책방 1칸을, 곁에는 책방마루를 두어 사랑방과 연결지었는데 책방과 책방마루 앞에 좁은 난간을 설치하여 사랑채와 연결하므로 서책을 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구성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은 월대위에 3칸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방을 두었는데 왼쪽 안방 2칸, 북쪽에 도장방 반문을 두었고 안방 크기를 대청 앞으로 더 돌출시켜 도장방 사용이 편리하도록 구성하였다.
안방 남쪽으로 부엌을 두고 그 남쪽에 중문에 딸린 아랫방을 두었다. 대청 오른쪽에 반문을 줄여 새댁이 사용하는 건넌방을 두었고 사랑채에서 연결된 신주방 사이에 협문을 설치하여 사당출입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안채의 특이한 구성은 대청 양쪽 방들 위를 흙으로 덮은 채로 연등 천장을 노출하여 둔 점이다. 좁은 마당에는 모두 전돌을 깔았고 마당 중앙에 장독간을 설치해 두었다.
누각의 사방벽에는 월담헌기(月潭軒記), 축천단기(祝天壇記), 사월 조임의 절필(節筆), 월담헌제영(月潭軒題詠) 등 당시의 명사들이 읊은 시가 많으며, 월담헌이란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서 취음한 것이다. 이 집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앞을 흐르며 선유굴(仙遊窟)과 옥선대(玉仙臺), 비파담(琵琶潭)을 바라보는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成化 17年 銘(1418)'의 막새기와가 전하여지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이라고도 하며, 고승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당이라고도 전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