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구 원촌동 산35-1
이 서원은 회덕의 명현<名賢> 충암 김정<沖庵 金淨>·수천 정광필<守天 鄭光弼>·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세 분을 모시는 사우<祠宇>로 출발하여 회덕의 용두록<龍頭麓>에 세워졌었다. 이 사우는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는데, 창건년대는 전해지지 않아 다만 세분중 가장 뒤늦은 분인 송인수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서거한 해인 명종 2년(1547)을 기준삼아 그 이후인 16세기 후반기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광해군 원년(1609) 송남수<宋枏壽>가 다시 건립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하였고, 그 해에 유생<儒生>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숭현<崇賢>이라 사액<賜額>되었다. 이어서 인조 19년(1641)에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과 야은 송시영<野隱 宋時榮> 두 분을 위한 별사<別祠>가 서원안에 따로 지어져 배향<配享> 되었다. 또한 이분들 이외에 기호성리학파<畿湖 性理學派>의 대표적인 분들이 숭현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즉 기호학파의 종사<宗師>인 율곡의 수제자로서 예론<禮論>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이 인조 24년(1646)에, 사계의 제자로서 당시 유림의 거봉<巨峯>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숙종 7년(1681), 숙종 21년(1695)에 배향되었다. 이렇게 모두 여덟분을 모셨기 때문에 팔현묘<八賢廟>라고도 하였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현종 8년(1667)에 건립된 비석만이 남아 있었다. 1994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당, 별사, 강당 등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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