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
지리산 자락이 길게 누워 멈춘 옥녀봉(玉女峯)아래인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단속사터가 있다. 그 옛날 절을 찾는 신도들이 단속사의 초입인 광제암문에서 미투리를 갈아신고 절을 한바퀴 돌아나오면 어느덧 미투리가 닳아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 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다.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던물이 10리 밖 냇물까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민초들의 불시를 짐작케 하는 단속사의 흔적은 솔밭 사이에 있는 당간지주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한쌍의 삼층석탑 뿐이다. 그 옛날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과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그 자취는 알 길 이 없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법랑(琺瑯)에 이어 선종을 익힌 명필 탄연(坦然)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동국대 박물관과 숙명여대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모두 한국 금석문의 명필작이다. 신행선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을 전래시킨 신상의 소유자였으니 단속사터는 한국불교사 내지 한국사상사의 기념적인 것이다.
단속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석에 의하면 단속사는 수백 칸이 넘는 절로서, 식객들이 너무 많아 학승들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식객을 줄일 수 있을가 하던 중 한 도인이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이전의 금계사(금溪寺)였던 절 이름을 단속사라 고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자 과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더니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손(金馹孫)이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頭流紀行)』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고 동쪽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단속사의 초입은 깎아 세운 듯한 '광제암문(廣濟椎門)'이라고 새겨진 우람한 바위로부터 시작된다. 용두마을 뒤쪽에 있는 이 석벽은 단속사로 들어가는 천연 석문(石門)으로, 단정하게 새겨진 해서체의 커다란 글씨는 최치원이 썼다고도 하나, 905(고려 성종 14)년에 이절의 스님이 쓰고 새긴 것이라 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금당지에는 만기가 있어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동·서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삼층석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고려말 강회백(姜淮佰)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면서 심었다는 수령 6백년 이상된 매화나무가 있다. 뒤에 그가 정당문학 벼슬을 하게 되자 '정당매(政堂梅)'로 부르게 되었으며 정당매를 기념하는 비각도 있다. 그로부터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이 가꾸어 그의 정신을 기리며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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