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
이곳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때의 대학자< 大學者 >이며 의병장< 義兵將 >인 조헌< 趙憲 >(1544∼1592)선생의 묘소< 墓所 >이다. 선생의 자< 字 >는 여식< 汝式 > 호는 중봉으로 조응지< 趙應祉 >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과 자질이 남과 다른 바가 있었으며 부모에 특히 효성스러웠다. 학행< 學行 > 또한 독실하여 정주학< 程朱學 >이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은 우계< 牛溪 > 및 이이< 李珥 >와 학연< 學緣 >을 맺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명종< 明宗 > 22년(1567)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한 후 교서관권지< 校書館權知 >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주교수< 定州敎授 >, 호조< 戶曹 >·예조좌랑< 禮曹佐郎 >, 통진현감< 通津縣監 >, 공조좌랑< 工曹佐郎 >, 전라도사< 全羅道事 >, 보은현감< 報恩縣監 >, 공주제독관< 公州提督官 >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그가 맡은 일은 물론 국가 정책< 政策 >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고 진언하였다. 특히 왜< 倭 >와의 화의교섭< 和議交涉 > 반대는 거의 목숨을 걸고 진언하였다. 선생은 왜적< 倭敵 >의 침입을 예측하고 그 대비책을 누차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 선생이 예측한 대로 임진란< 壬辰亂 >이 일어나자 옥천< 沃川 >에서 의병< 義兵 >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승장< 僧將 > 영규대사< 靈圭大師 >와 함께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 錦山 >에 집결한 수만의 왜적을 불과 700명의 군사로 공격하다 전원< 全員 > 전사< 戰死 >하였다. 선생의 문인< 門人 >들이 그후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 合葬 >하고 700의총< 義塚 >이라 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이곳에 안장< 安葬 >하였다. 처음 옥천군 안읍 도리동에서 인조< 仁祖 >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사후< 死後 > 영의정< 領議政 >에 추증< 追贈 >되었고 문묘< 文廟 >에 배향< 配享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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