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태수선생유물 - 충효와 애국충정이 넘쳐 흐르는 장태수 선생유물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김제시 금구면 65

장태수선생은 인동(仁同)장씨이며, 자는 성안(聖安)이다. 현종 7년(1841년)에 금구군 서두면 상신리에서 태어났다. 철종 12년(1861년) 21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종 12년(1875년)에는 연로한 부친을 보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으며, 고종 26년(1889년) 거듭 동부승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시국을 개탄하고 있었는데, 동학군으로 시국이 소란하게 되자 바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무마하고, 봉급을 고산현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고 집에 돌아왔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일본의 만행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한탄한 끝에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교육을 펼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고향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창설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고 있었는데, 1910년 경술치욕(庚戌恥辱)을 당하자 폐교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의관을 갖추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대면을 사절하고 있다가 선대 산소에 참배하여 통곡하며 하직을 고했다. 그 후 선생은 유서를 써놓고 단식에 들어 갔으며 때는 1910년 음력 11월 1일에 조상의 사당에 통곡으로 고별했다. 또한 단식중에는 충효와 애국충정이 넘쳐 흐르는 "고(告)대한동포문"이라는 유서를 써 놓고 27일만인 1910년 음력 11월 2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한말풍운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을 떴다.
선생의 유물로는 영정, 금관, 소관, 각대, 발막, 조복(朝服:내의), 후수(後璲), 호패, 홀(笏), 패도(佩刀), 원선(遠扇), 어사화, 동상(궤 포함), 교지 35점(각 품목별), 칙지(勅旨), 칙명(勅名), 첩(帖) 등이 있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