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 원정동 산60-2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묘는 당초에는 연기<燕岐>에 장사<葬事>하였다. 후에 공주 등 여러 곳으로 옮겨 졌다가 숙종26년(1700)이곳으로 이장<移葬>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표<墓表>와 묘비<墓碑>는 이장 후에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 문인석 1쌍과 상석<床石>이 있다. 묘비문은 외손인 판서 민진후<判書 閔鎭厚>가 글을 짓고 증손인 현령 요좌<懸令 堯佐>가 글씨를 썼다. 선생의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며 1624년 진사가 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다. 효종과 같이 북벌 계획 도중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로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논란 중 승리하여 우참찬·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했다.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당초 1672년 공주에 묘를 썼다가 이곳으로 1713년 1월에 이장하였다. 동춘당<同春堂>의 장례내용<葬禮內容>은 1차 현종14년(1673) 연기 죽안리, 2차 숙종 2년(1676) 회덕 흥농리, 3차 숙종 15년(1689) 공주 유곡, 4차 숙종 26년(1700) 진령 사점동(서구 원정동 현재위치)이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묘는 당초에는 연기<燕岐>에 장사<葬事>하였다. 후에 공주 등 여러 곳으로 옮겨 졌다가 숙종26년(1700)이곳으로 이장<移葬>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표<墓表>와 묘비<墓碑>는 이장 후에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 문인석 1쌍과 상석<床石>이 있다. 묘비문은 외손인 판서 민진후<判書 閔鎭厚>가 글을 짓고 증손인 현령 요좌<懸令 堯佐>가 글씨를 썼다. 선생의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며 1624년 진사가 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다. 효종과 같이 북벌 계획 도중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로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논란 중 승리하여 우참찬·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했다.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당초 1672년 공주에 묘를 썼다가 이곳으로 1713년 1월에 이장하였다. 동춘당<同春堂>의 장례내용<葬禮內容>은 1차 현종14년(1673) 연기 죽안리, 2차 숙종 2년(1676) 회덕 흥농리, 3차 숙종 15년(1689) 공주 유곡, 4차 숙종 26년(1700) 진령 사점동(서구 원정동 현재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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