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29
신후재(1636∼1699)는 조선조< 朝鮮朝 >의 문신< 文臣 >으로 본관< 本貫 >은 평산< 平山 >, 호< 號 >는 규정< 葵亭 >이다. 현종< 顯宗 > 원년< 元年 >(1660) 식년문과< 式年文科 >에 급제< 及第 >한 후 벼슬길에 올라 강원도관찰사< 江原道觀察使 > 등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 庚申大黜陟 >으로 삭직< 削職 >되었다가 기사환국< 己巳換局 >(1689)으로 남인< 南人 >이 집권하자 우승지< 右承旨 >, 도승지< 都承旨 > 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사은사겸진주주청부사< 謝恩使兼陣奏奏請副使 >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강화< 江華 >, 개성부유수< 開城府留守 >·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 등을 지냈으며, 갑술옥사< 甲戌獄事 >(1694)에 유배되어 숙종< 肅宗 > 23년(1697)에 석방된 뒤 은퇴하여 충주< 忠州 > 오갑장< 鰲甲莊 >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영정은 좌안8분면< 左顔八分面 >의 정장관복< 正裝官服 >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 全身像 >이다. 복식< 服飾 >은 숙종연간< 肅宗年間 >의 제식< 制式 >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초상화< 肖像畵 >의 상용형식< 像容形式 >에서는 동시대의 다른 초상화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릍테면 공수< 拱手 >를 취하지 않고 양손에 홀< 笏 >을 받들어 쥔 점, 손톱의 형용< 形容 >, 단령< 團領 > 위에 각대< 角帶 >를 나타내지 않은 점, 의자와 족좌대< 足座臺 >가 겹쳐진 부위의 불합리한 형태표현 등이 특이하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후손가< 後孫家 >에 전해오는 바대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지래본< 持來本 >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점에서 초상화사연구< 肖像畵史硏究 >의 주목할 만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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