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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 -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 (丹齋申采浩先生生家址)

by 넥스루비 2007. 8. 7.

대전 중구 어남동 233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난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되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19세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였으며,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사상 가장 강건·웅혼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서 손꼽히고 있다. 1924년부터 동아일보 등에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1928년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6년 2월 21일(음 1월 28일) 가장 위대한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 57세였다. 1992년 여름에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하여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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