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
이곳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때의 문신< 文臣 >이며 시인< 詩人 >인 정철< 鄭撤 >(1536∼1593)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선생의 자< 字 >는 계함< 季涵 >이고, 호< 號 >는 송강< 松江 >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명종< 明宗 > 17년(1562) 별시< 別試 > 문과< 文科 >에 장원급제< 壯元及第 >한 후 함경도< 咸鏡道 > 암행어사< 暗行御史 >, 교리< 校理 > 등을 지낸 뒤 고향 창평으로 가 있다가 선조 13년(1580) 이후 3년간 강원< 江原 >, 전라< 全羅 >, 함경< 咸鏡 > 3도< 三道 > 관찰사< 觀察使 >를 지낸 후에 우의정< 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에 올랐다. 세자< 世子 > 책봉< 冊封 > 문제로 파직되었다가 선조< 宣祖 > 25년(1592)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국왕을 의주< 義州 >까지 모셨고, 명< 明 >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선생은 문신이기보다는 시인으로서 그의 천부적< 天賦的 >인 재질을 나타내 우리나라 가사문학< 歌辭文學 >의 최고봉으로 『관동별곡< 關東別曲 >』, 『사미인곡< 思美人曲 >』, 『성산별곡< 星山別曲 >』 등의 가사와 많은 단가< 短歌 >를 남겼다. 원래 묘소가 경기도< 京畿道 > 고양군< 高陽郡 > 원당면< 元堂面 >에 있던 것을 현종< 顯宗 > 6년(1665) 우암< 尤庵 > 송시열< 宋時烈 > 선생께서 현 묘소를 정하고 후손 정포< 鄭浦 >가 이장하여 사우< 祠宇 >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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