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
이 비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의병< 義兵 >을 이끌고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한 조헌< 趙憲 >(1544∼1592)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선생은 명종< 明宗 >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 官職 >을 거치면서 국정< 國政 >을 바로잡는데 헌신하였고 학문 연구에 힘써 학자< 學者 >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 宣祖 >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 沃川 >에서 의병을 일으며 승장< 僧將 > 영규< 靈圭 >와 합세하여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였다. 그후 적이 금산< 錦山 >을 거점으로 충청도< 忠淸道 > 일대< 一帶 >를 석권하려 하자 승장 영규와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중과부적< 衆寡不敵 >으로 전원 전사< 戰死 >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肅宗 > 36년(1710) 선생이 승첩을 이루었던 이곳에 김진규가 글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써 이 비를 세웠다.
이 비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의병< 義兵 >을 이끌고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한 조헌< 趙憲 >(1544∼1592)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선생은 명종< 明宗 >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 官職 >을 거치면서 국정< 國政 >을 바로잡는데 헌신하였고 학문 연구에 힘써 학자< 學者 >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 宣祖 >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 沃川 >에서 의병을 일으며 승장< 僧將 > 영규< 靈圭 >와 합세하여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였다. 그후 적이 금산< 錦山 >을 거점으로 충청도< 忠淸道 > 일대< 一帶 >를 석권하려 하자 승장 영규와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중과부적< 衆寡不敵 >으로 전원 전사< 戰死 >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肅宗 > 36년(1710) 선생이 승첩을 이루었던 이곳에 김진규가 글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써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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