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 737-1
경모재< 景慕齋 >와 대봉재사< 大峯齋舍 >는 단종복위< 端宗復位 >를 도모하다가 사육신< 死六臣 > 등과 함께 차열형< 車裂刑 >을 당해 죽은 충장공< 忠莊公 > 권자신< 權自愼 >(?-1456(세조< 世祖 >2)을 주위로 모시고, 단종< 端宗 >의 외조부< 外祖父 > 화산부원군< 花山府院君 > 권전< 權專 >의 종손< 從孫 >으로 13세 때에 단종복위< 端宗復位 > 사건에 연좌, 영해< 寧海 >에 유배되어 영해입향조< 寧海入鄕祖 >가 된 오봉< 五峯 > 권책< 權策 >(1442(세종< 世宗 >26-?) 및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에 척화< 斥和 >를 주장한 남곡< 南谷 > 권상길< 權尙吉 >(1610(광해군< 光海君 >2)-1674(현종 15))을 배향하는 건물이다. 경모재< 景慕齋 >는 당호< 堂號 >를 망월< 望越 >이라 하는데 김세락< 金世洛 >의 (망월당기< 望越堂記 >)에는 ‘헌묘을미< 憲廟乙未 >(1835) 향사대부의입원어대봉산하< 鄕士大夫議立院於大峯山下 >…’이라 있고, 김세락< 金世洛 >의 (경모재기< 景慕齋記 >)에는 ‘전거팔십이년사림의건대봉원사< 前距八十二年士林議建大峯院祠 >…’라 있으며 권영우< 權永羽 >가 쓴 (경모재창건기사후< 景慕齋創建記事後 >)에는 ‘…삼조만묘지소야구유충현사숭봉지일자기사< 三祖萬墓之所也舊有忠賢祠崇奉之一自己巳 >(1869)철원지후< 撤院之後 > …수성토규연맥지장< 遂成兎葵燕麥之場 >…’이라 한 것을 보면 헌종< 憲宗 >1년(1835)에 대봉산하< 大峯山下 >에 충현사< 忠賢祠 >를 건립했다가 헌종< 憲宗 >13년(1847) 지방 유림의 공의로 대봉서원< 大峯書院 >으로 창건되었는데 고종< 高宗 >6년(1869)에 서원철폐령< 書院撤廢令 >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리하여 (창건기사후< 創建記事後 >)에는 ‘사력불체유의미취< 事力不逮有意未就 > 적유년기< 積有年紀 > 시어신해< 始於辛亥 >(1911)지추< 之秋 > 준발공의파정임원< 峻發公議爬定任員 >…’이라 있고, (망월당기< 望越堂記 >)에 ‘…내취철원구허탁기지이당지중남위양당< 乃就撤院舊墟拓其址而堂之中南爲凉堂 >…’이라 있으며 (창건기사후< 創建記事後 >)에 ‘이시년< 以是年 >(1911)시월신해개기어재사지동< 十月辛亥開基於齋舍之東 >…’이라 하고, ‘익년< 翌年 >(1912)정월시역이월십구일입주< 正月始役二月十九日立柱 > ’라 했으며 (경모재기< 景慕齋記 >)에 ‘태상임자< 太上壬子 >(1912)중춘범사열월이공고성종시주기사자< 仲春凡四閱月而功告成終始主其事者 > 오봉공< 五峯公 >15세손진모< 世孫進模 >…’라고 있어서 충현사< 忠賢祠 > 훼철 후 40여 년간 적막하다가 1911년 가을에 활발한 공의< 公議 >가 일어나 건립임원을 정하고, 10월에 재사< 齋舍 > 동쪽 옛터를 닦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9일에 입주< 立柱 >, 4개월만에 준공한 것이다. 따라서 대봉재사< 大峯齋舍 >는 1912년 경모재< 景慕齋 > 창건 이전부터 있어 온 건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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