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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정려비 - 정담정려비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

정담< 鄭湛 >은 명종< 明宗 >3년(1548) 평해군< 平海郡 > 기성면< 箕城面 >사동리< 沙洞里 >(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자< 字 >는 언결< 彦潔 >, 본관< 本貫 >은 야성< 野城 >이다. 5세에 모< 母 >를 여의고, 10세때에 부< 父 >와 사별하여 자부< 姉夫 > 황응징< 黃應澄 > 슬하에서 수학< 修學 >하며 자랐다. 일찌기 무관< 武官 >에 뜻을 두었는데 24세때에 영남동도병마사< 嶺南東道兵馬使 > 홍치무< 洪致武 >의 편장< 편將 >이 되고, 그후 북병사< 北兵使 > 신립< 申砬 >의 막하에서 근무하던 1583년 호적< 胡賊 > 이탕개< 尼湯介 >를 소탕할 때 돌격장< 突擊將 >으로 큰 공을 세웠다. 선조< 宣祖 > 16년(1583), 35세때에 무과< 武科 >에 급제하여 역시 신립< 申砬 >의 아장< 亞將 >, 또 순찰사< 巡撫使 > 김수< 金수 >의 편장< 編將 >, 용양위부장< 龍양衛部將 >을 거쳐 회령판관< 會寧判官 >, 경원판관< 慶源判官 >, 오위도총부< 五衛都摠府 > 도사< 都事 >를 역임하였다. 선조< 宣祖 > 23년(1590) 청주목사< 淸州牧使 >로 임명되었다가 25년(1592) 4월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서남방 방위의 중책을 띄고, 김제군수< 金堤郡守 >로 부임하였다. 곧 군사< 軍事 >를 정비하고, 조방장< 助防將 > 이봉< 李峯 >과 함께 웅치< 熊치 >에 나아가 산길을 끊어 설책< 設柵 >하고, 소조천융경< 小早川隆景 >의 15,000명의 적군과 대치하였다. 7월 7일부터 벌어진 격전끝에 적< 敵 >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 마침내 화살이 떨어지자 육탄전< 肉彈戰 >으로 싸워 적의 예봉은 꺾었으나 이튿날 정오< 正午 >경 육탄전< 肉彈戰 >중 4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조실록< 宣祖實錄 >에 의하면 적병< 敵兵 >도 조선군< 朝鮮軍 >의 충의에 감복하여 흩어진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조< 弔 > 조선충간의담< 朝鮮忠肝義膽 > ’이라는 표말을 세웠다 한다. 징비록< 懲悲錄 >에는 ‘이는 정담< 鄭湛 >, 변응정< 邊應井 > 두 장수가 힘써 싸운 것을 칭찬한 것 ’이라 하고 ‘이로 말미암아 전국토가 다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전라도< 全羅道 >만은 유독 보전되었다 ’고 있다. 조정< 朝廷 >에서는 삼등공신< 三等功臣 >으로 포상하고 선조< 宣祖 > 26년(1593)에 가선대부< 嘉善大夫 > 병조참판< 兵曹參判 >에 증직하였다.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격렬했던지 이항복< 李恒福 >의 백사집< 白沙集 >에 ‘나의 장인 권율< 權慄 >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 幸州 >싸움이 공< 功 >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全羅道 > 웅치< 熊치 >싸움을 주도한 정담< 鄭湛 >의 공< 功 >이 가장 크고,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그가 1000명도 안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 湖南 >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고 있다. 정여< 旌閭 >는 난후< 亂後 > 선조년간< 宣祖年間 >에 거론된 적이 있으나 숙종< 肅宗 > 16년(1690)에 교지< 敎旨 >가 비로소 내렸다. 처음에는 인량촌< 仁良村 > 마을 가운데에 목비< 木碑 >로 세웠다. 세 차례나 목비를 세웠으나 퇴락함에 정조< 正祖 > 5년(1782) 마을앞 길가에 중건하여 석비< 石碑 >를 세웠다. 영해< 寧海 >의 향현사< 鄕賢祠 >, 김제< 金堤 >의 충렬사< 忠烈祠 >, 영양< 英陽 >의 명고서원< 明皐書院 >에 향사되었으나 이들 사당< 祠堂 >은 대원군< 大院君 >의 폐원령< 廢院令 >에 의해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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