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충북대학교 산48충북대학교박물관
본 유물< 遺物 >은 청원군 북일면 우산리에 거주하는 변종화의 11대 조부인 변성인< 卞性寅 >(1566~1641)의 측실 구례 손씨의 묘소에서 「미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굴되었는데 본 유의< 遺衣 >는 선조< 宣祖 > 말년< 末年 >의 것이다. 1979년< 年 > 3월 20일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 뒷산에서, 청원군 북일면 우산리 478에 거주하는 변종화(67세)가 그의 11대 조부인 변성인< 卞性寅 >(1566~1641)의 묘소를 청원군 북일면 청석리 뒷산에서 청원군 미원면 설암리로 이장하고 아울러 11대 조모 고령신씨, 보성오씨 부인의 묘소를 차례로 부장하다가 둘째부인 구레 손씨의 묘소에서 「 미라」화된 시신과 함께 유의< 遺衣 >를 발굴하였다. 1979년< 年 > 3월 18일에 이장하고 수의는 묘소 부근에 버린 것을 변종화씨의 아들 변익수(충북대 임학과 재학중)의 제보를 받고 1979년< 年 > 3월 28일에 동 유물의 일부를 수득하고 여타의 유물< 遺物 >은 동 묘소에서 발굴하여 1979년< 년 4월 10일에 변종화씨가 충북대 박물관에 기증 하였다. 본 유물< 本 遺物 >의 주인공< 主人公 >은 변성인< 卞性寅 >의 측실인 구레손씨이다. 손씨의 생졸년< 生卒年 >은 알 수 없으나 변성인씨< 卞性寅氏 >가 1566~1641년< 年 >까지 생존< 生存 >하였으니까 본 부인인 신씨 외에 손씨, 오씨는 측실이기 때문에 그 연령차를 10세로 보고 50세를 일기로 본다면 1576~1626 이 되므로 적어도 선조 말년에 해당 되므로 임난 전후로 보는 것이 좋겠다. 저고리의 길이가 비교적 긴것이 특징이며 소매 끝에 넓은 삼유가 대어있는것도 특징이다. 여러개의 감투가 나왔으며 그 형태가 매우 특징이 있다. 남명주 솜 저고리는 삼수< 삼袖 >가 달린 목판< 木板 >깃으로 저고리의 길이느 58cm이다. 겉과 안고름이 다 있으나 장식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고, 단지 2cm 넓이의 매듭 용< 用 >이다. 소색 단속곳은 오늘의 제도와 같으며 밀방과 끈이 함께 달려 있어 오늘의 민속< 民俗 >을 상고하는데 도움을 준다. 겹솜바지는 그 제도가 단속곳과 같으나, 아래는 터있고, 바지부리가 36cm나 된다. 겹솜 휘장저고리, 포폭< 布幅 >을 반폭식< 半幅式 >으로 이어붙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누비창의는 길이가 133cm인데 트임을 75cm했으며 겹유직령포 삼수< 삼袖 >가 달려 있다. 소창자< 소모자(감토)< 小帽子(甘吐) >는 임란< 壬亂 > 당시의 것과 유관< 有關 >한 것으로 보며 전< 前 >에 이런 모자< 帽子 >가 있었는지는 미상< 未詳 >이다. 모든 서민< 庶民 >에게 이 모자< 帽子 >를 쓰라고 하였을 때, 남이 보는데서는 쓰고 보지않은 데서는 벗고 다녔다고 기록< 記錄 > 되어 있다. 혹시 몽고< 蒙古 >의 유풍< 遺風 >에서 연유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명< 明 >의 제도< 制度 >를 그대로 습용< 襲用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밖에 적삼 겹솜치마, 명목, 염수등이 있다.
본 유물< 遺物 >은 청원군 북일면 우산리에 거주하는 변종화의 11대 조부인 변성인< 卞性寅 >(1566~1641)의 측실 구례 손씨의 묘소에서 「미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굴되었는데 본 유의< 遺衣 >는 선조< 宣祖 > 말년< 末年 >의 것이다. 1979년< 年 > 3월 20일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 뒷산에서, 청원군 북일면 우산리 478에 거주하는 변종화(67세)가 그의 11대 조부인 변성인< 卞性寅 >(1566~1641)의 묘소를 청원군 북일면 청석리 뒷산에서 청원군 미원면 설암리로 이장하고 아울러 11대 조모 고령신씨, 보성오씨 부인의 묘소를 차례로 부장하다가 둘째부인 구레 손씨의 묘소에서 「 미라」화된 시신과 함께 유의< 遺衣 >를 발굴하였다. 1979년< 年 > 3월 18일에 이장하고 수의는 묘소 부근에 버린 것을 변종화씨의 아들 변익수(충북대 임학과 재학중)의 제보를 받고 1979년< 年 > 3월 28일에 동 유물의 일부를 수득하고 여타의 유물< 遺物 >은 동 묘소에서 발굴하여 1979년< 년 4월 10일에 변종화씨가 충북대 박물관에 기증 하였다. 본 유물< 本 遺物 >의 주인공< 主人公 >은 변성인< 卞性寅 >의 측실인 구레손씨이다. 손씨의 생졸년< 生卒年 >은 알 수 없으나 변성인씨< 卞性寅氏 >가 1566~1641년< 年 >까지 생존< 生存 >하였으니까 본 부인인 신씨 외에 손씨, 오씨는 측실이기 때문에 그 연령차를 10세로 보고 50세를 일기로 본다면 1576~1626 이 되므로 적어도 선조 말년에 해당 되므로 임난 전후로 보는 것이 좋겠다. 저고리의 길이가 비교적 긴것이 특징이며 소매 끝에 넓은 삼유가 대어있는것도 특징이다. 여러개의 감투가 나왔으며 그 형태가 매우 특징이 있다. 남명주 솜 저고리는 삼수< 삼袖 >가 달린 목판< 木板 >깃으로 저고리의 길이느 58cm이다. 겉과 안고름이 다 있으나 장식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고, 단지 2cm 넓이의 매듭 용< 用 >이다. 소색 단속곳은 오늘의 제도와 같으며 밀방과 끈이 함께 달려 있어 오늘의 민속< 民俗 >을 상고하는데 도움을 준다. 겹솜바지는 그 제도가 단속곳과 같으나, 아래는 터있고, 바지부리가 36cm나 된다. 겹솜 휘장저고리, 포폭< 布幅 >을 반폭식< 半幅式 >으로 이어붙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누비창의는 길이가 133cm인데 트임을 75cm했으며 겹유직령포 삼수< 삼袖 >가 달려 있다. 소창자< 소모자(감토)< 小帽子(甘吐) >는 임란< 壬亂 > 당시의 것과 유관< 有關 >한 것으로 보며 전< 前 >에 이런 모자< 帽子 >가 있었는지는 미상< 未詳 >이다. 모든 서민< 庶民 >에게 이 모자< 帽子 >를 쓰라고 하였을 때, 남이 보는데서는 쓰고 보지않은 데서는 벗고 다녔다고 기록< 記錄 > 되어 있다. 혹시 몽고< 蒙古 >의 유풍< 遺風 >에서 연유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명< 明 >의 제도< 制度 >를 그대로 습용< 襲用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밖에 적삼 겹솜치마, 명목, 염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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