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65
인량동< 仁良洞 >의 팔대종가< 八大宗家 >가 취락< 聚落 >을 이루고 사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산록< 山麓 >의 양지바른 자리에 터전을 잡았다. 현소유자< 現所有者 > 근화씨< 根華氏 >(70여재< 餘才 >, 재령< 載寧 > 이씨< 李氏 >)의 15대조< 代祖 >가 입향시조< 入鄕始祖 >로 조선< 朝鮮 > 성종년간< 成宗年間 >에 종택< 宗宅 >을 초창< 初創 >한 것으로 추정< 推定 >되나, 현재< 現在 >의 집은 뒤쪽의 일단< 一段 > 높은 자리에 이건< 移建 >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확실한 이건년대< 移建年代 >는 알 수 없다. 충효당< 忠孝堂 >이란 사랑채는 정자< 亭子 >와 같은 구성< 構成 >을 보이는데 후학< 後學 >의 교육장< 敎育場 >으로 사용< 使用 >되었으며 임란후< 壬亂後 >의 건축< 建築 >이라 한다. 전관< 全觀 >에서 북< 北 >쪽은 태백산맥< 太白山脈 >이 둘러섰고 남< 南 >쪽은 탁 트인 들판의 한가운데로 송천이 서< 西 >에서 동< 東 >으로 흘러가는 전형적< 典形的 >인 길지< 吉地 >에 마을이 동서< 東西 >로 길게 확산되어 있으며, 산록을 파고드는 골의 형상이 나래형국 이라하여 나래골이라 부른다. 본 가옥< 家屋 >은 골의 동단< 東端 > 아늑한 자리를 차지하여 앞쪽 들판을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좌< 左 >에 사랑채, 우< 右 >에 안채를 앉히고 안채의 후방< 後方 > 경사진 대나무숲 속에 사당 일곽< 一廓 >을 배치< 配置 >하였다. 반듯한 내정< 內庭 > 정면< 正面 >에는 3간< 間 > 대청< 大廳 >이 놓이고 좌측< 左側 >에 tot방, 우측< 右側 >에 도장방과 안방이 접< 接 >하였다. 내정< 內庭 >의 좌측< 左側 > 사랑방 부분< 部分 >은 샛방에서 1간< 間 > 왼편으로 벗어나 있는데, 이는 내정< 內庭 >을 넓히기 위하여 확장된 것으로 초창평면< 初創平面 >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안채 부분< 部分 >의 목재< 木材 >에서도 구재< 舊材 >가 많이 보이고 있어 이 부분< 部分 >도 이건시< 移建時 > 다소< 多少 >의 변형< 變形 >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청< 大廳 >의 후면벽중< 後面壁中 > 우측< 右側 > 2간< 間 >의 각간< 各間 >에 있는 두짝열개 널문에 중간설주가 서 있는데 윗틀 하면< 下面 >에 별도< 別途 >의 오래된 장부구멍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재< 舊材 >를 사용< 使用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건시기< 移建時期 >를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로 추정하게 한다. 안채의 구조< 構造 >는 높은 축대를 쌓고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위에 방주< 方柱 >를 세웠으나 대청< 大廳 >앞 기둥만은 원주< 圓柱 >를 사용< 使用 >하였다. 대청< 大廳 > 상부< 上部 >는 삼량가< 三樑架 >에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세운 간략한 가구< 架構 >로 되어 있다. 높은 자연석< 自然石 > 축대위에 서 있는 사랑채(충효당< 忠孝堂 >)는 정면< 正面 > 4간< 間 >, 측면< 側面 > 2간< 間 > 규모< 規模 >의 ㄱ자형< 字形 >으로 2간반< 間半 >크기의 온돌방< 溫突房 >을 설치한 부분< 部分 > 이외< 以外 >는 우물마루를 깐 넓은 마루방으로 꾸몄다. 구조< 構造 >는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위에 방주< 方柱 >를 세웠고 대청< 大廳 >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오량가< 五樑架 >로 파련대공의 윗몸에 첨차를 끼워 종도리< 宗道里 >를 받았으며 합각 하부< 下部 >만 우물반자로 처리하였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祠堂 >이 구존< 具存 >하는 조선시대< 朝鮮時代 > 반가< 班家 >로 초창< 初創 >은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로 추측되나 후대< 後代 >에 이건< 移建 >한 건물< 建物 >이다. 그러나 안채는 현위치< 現位置 >로의 이건시기< 移建時期 >가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로 짐작되는 고졸한 건축물< 建築物 >로 다소간< 多少間 >의 변형< 變形 >은 보이나 조선시대< 朝鮮時代 > 주택연구< 住宅硏究 >의 중요< 重要 >한 유구< 遺構 >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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