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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한풍루 - 전주의 한벽당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삼한의 하나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1193-2

군청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대천 건너편인 당산리의 남산자락 언덕 위에 유서 깊은 정자 한풍루(寒風樓)를 보려고 건너가는데, 때 마침 이 고장의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 인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남대천 다리 위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리고, 긴 다리를 아치형 차광시설로 덮어 화려한 조명시설을 갖추었으며, 양 옆으로는 반딧불리의 생태를 비롯하여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깨끗한 자연환경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반딧불이를 본 지가 얼마이런가. 우리 어렸을 때에는 여름 밤에 흔히 볼 수 있는 ‘개똥벌레’ 였고, 할머니로부터 “옛 선비는 저 개똥벌레를 잡아 그 불빛으로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데 너는 왜 좋은 등잔불 밑에서도 공부를 않느냐” 는 가르침을 받던 그 반딧불이 이다.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만 서식하는 곤충이어서 환경이 오염된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었고, 오염되지 않은 환경이 잘 보존된 이 남대천 부근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이어서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그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깨끗한 강 남대천을 굽어 보면서 역사 속에 파란을 겪은 정자 한풍루가 서 있다. 선조 때의 풍류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가 이곳에 올라보고 호남삼한(湖南三寒: 남원 廣寒樓, 전주 寒碧樓, 무주 寒風樓) 중의 으뜸이라고 했다는 바로 그 정자이다.
1층은 정면 3간, 측면 4간이고, 2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인 익공계 팔작지붕의 2층 건물이다. 언제 누구에 의하여 세워진 정자인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이 정자는 세조 11년(1465)에 전라관찰사를 지낸 일재 성임(逸齋 成任)이 읊은 시가 걸려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465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정자는 임진난 때 불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았었는데 백호 임제의 아우 임권(林權)이 무주현감으로 부임한 다음날 밤의 꿈에 죽은 형 백호가 나타나 누각의 빈터에서 퉁소를 불면서,
“나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늦었느냐? 네가 마침 여기 왔으니 이 누를 재건하여 달라.” 하여 생시에 이 정자를 사랑했던 형의 넋을 위로키 위하여 그 아우 임권이 다시 세웠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에는 안국사에서 불교포교당으로 쓰다가 유지비가 없어 일본사람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갔고, 양산 사람 이명주(李命周)가 일본사람으로부터 다시 삼으로서 양산의 금강 가로 옮겨지는 운명에 처하였으며, 이름마저 금호루(錦湖樓)라고 바뀌는 수난을 겪었다.
광복 후에 이 고장에서는 지방유지 들이 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끈질긴 노력 끝에 다시 매입하고 당초의 위치였던 이곳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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