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574
성주군청에서 서북 방면으로 약 5.5㎞ 국도를 따라가면 김천시와 접경하여 동쪽은 초전면, 남쪽은 성주읍과 대가면 서남쪽은 금수면과 인접한 곳에 성주< 星州 > 도씨< 都氏 >와 성산여씨< 星山呂氏 >의 집성촌이 있고 그 마을 뒤 농로< 農路 >를 따라 나지막한 야산 앞에 기국정< 杞菊亭 >이 건물의 전면이 넓게 트인곳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1794년 성균< 成均 > 진사< 進士 > 도우경< 都禹璟 >의 부친 상욱< 尙郁 >께서 후진양성의 장을 만들기 위하여 착공하였으나 공사중 흉년으로 공사가 중단되자 당시 성주< 星州 > 목사< 牧使 > 성종인< 成鍾仁 >이 지방 순시중 공< 公 >의 뜻을 높이 치하하고 건립비를 지원하여 1795년 2월에 건물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1998년 도비와 군비 지원으로 담장과 협문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일자형< 日子型 >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향으로 30°정도틀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와가로 구성되어 있다. 우측으로부터 대청마루, 온돌방, 온돌방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온돌방의 난방은 전면과 측면의 함실에서 하도록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우측협칸에 위치한 대청마루는 전면이 개방되어있고 대청과 어칸측 온돌방 사이에는 들어열개로 되어있다. 대청의 우측벽과 뒷벽은 판벽으로 외부와 칸막이하고 판벽가운데 설치한 창호에는 가운데설주가 서 있으며 창틀에 띠장널창이 달려있다. 창틀은 연귀맞춤을 하였고 널창은 둔테에 달았다. 가운데설주에 배목을 박아 널창에 달린 고리로 걸어 잠그게 하였다. 가운데 설주가 훼손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 있음은 비교적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어렵게 건립한 집이라 애초에 집의 규모를 크게하지 않으려 함이 엿보인다. 가운데 방 뒷벽과 좌측협칸방 측면의 벽면중앙에 지금은 흙바름마감을 하였지만 문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바닥은 온돌바닥위에 장판지로 벽은 벽지로 마감하였다. 대청마루의 바닥은 우물청판을 깔았다. 전면기둥은 덤벙주초위에 원주를 사용하여 납도리로 꾸몄고 뒷면의 기둥은 덤벙주초위에 방주를 사용하여 납도리로 꾸몄다. 상부가구는 비교적 간단한 3량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키고 산자널에는 치받이흙으로 발라 마감한 연등천정으로 하였으며 비교적 건실한 목재를 사용하여 당시의 투박한 치목수법이 비교적 돋보인다. 기국정< 杞菊亭 >은 조선후기에 건축된 것으로 특히 조선시대의 초< 初 > ·중기< 中期 >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영쌍창< 영雙窓 >이 비교적 건축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이해하고 건축수법을 연구함에 좋은 자료로 사료되어 보존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에서 지정조사 신청당시 기국정< 杞菊亭 >과 협문< 夾門 > 각각 2동< 棟 >으로 신청하였는데 협문< 夾門 >은 1998년 담장보수공사때 함께 지은 것으로 만일 지정하려면 이를 일괄< 一括 >하여 지정함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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