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56-1
본 마애여래입상은 국립공원 가야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용기골 동편의 그리 넓지 않은 평탄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백운대< 白雲臺 >로 불리는 경승이 뛰어난 곳에서 약 50m 쯤 내려온 지점으로 해발고도가 약 1,150m에 달한다고 한다. 가야산 정상을 향하는 주등산로에서 벗어난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비교적 호젓한 곳이지만, 현재는 무당들의 주술적인 기도처가 되어 불상 앞에는 항상 촛불과 제물이 갖추어져 있는 실정이다. 화강암 판석을 거칠게 주형< 舟形 >으로 다듬어 광배< 光背 >로 삼고, 가운데 부분에 여래입상을 양각< 陽刻 >하였다. 주형 광배의 위에는 거대한 판석이 지붕처럼 덮여져 있어, 일종의 변형된 석굴< 石窟 >, 혹은 보개< 寶蓋 >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 여래상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여래입상은 라발< 螺髮 >로 두툼한 육계< 肉계 >와 풍만한 상호< 相好 >를 가졌으며, 탁본 결과 눈을 가늘게 뜨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확인된다. 이마에 백호< 白豪 >의 흔적이 보이고, 귀는 장이< 長耳 >로서 어깨 부근까지 늘어져 있고, 코는 약간 훼손되었다. 어깨는 풍만하며 목에는 삼도< 三道 >가 뚜렷하다. 수인< 手印 >은 오른손의 경우 비교적 뚜렷한 시무외인< 施無畏印 >을 하고 있고, 왼손은 마멸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여원인< 與願印 >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납의는 통견인데, U자형으로 깊숙히 조각된 목부분과, 마치 점이 올린 듯한 오른 소매 끝의 양감, 허리부분에 새겨진 깊은 주름 등을 보면 납의가 뚜꺼운 천으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반신 둘레의 양각된 흔적은 상의< 裳衣 >를 나타내려 한 듯하나 조각 수법이 매우 거칠고 또한 마멸이 심해 현재는 뚜렷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대좌< 臺座 >는 후대에 무속인들이 젯상을 두기 위해 불상 앞을 평탄하게 다듬기 위해 보축< 補築 >이 이루어지면서 땅속에 묻힌 듯 하며, 주변 환경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된다. 본 마애여래입상의 조성연대는 관련 기록이 부족하여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성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본 마애여래입상은 두부가 몸체에 비해 크며, 전체적인 균형도 맞지 않는다. 이는 8세기대의 조화를 이룬 완벽한 불상 형식이 퇴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현재 가야산 일원은 불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해인사나 법수사의 예에서 보듯이, 신라 하대 9세기 대에 본격적으로 조영된 것이다. 이를 참조하면 본 마애려애입상의 조성도 가야산이 본격적인 불교 중심지로 개척되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 본 마애여래입상은 주형 광배의 위를 거대한 판석이 덮고 있는 일종의 변형된 석굴 형식을 갖추고 있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바 있는 마애불의 두부 위에 판석을 설치하여 비바람을 막는 보개< 寶蓋 >의 시원적 형태로 추정 가능한 조성연대의 추정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본 마애여래입상의 조성연대는 신라 하대(9세기경)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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