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동구 용운동 356-1
문충사는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며 순국선열인 송병선<宋秉璿 : 1836-1905>·송병순<宋秉珣 : 1839-1912) 형제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원래는 1908년 충북 영동에 세워져 있었는데, 송병선 선생의 순국 60년 기념사업으로 1966년 선생의 탄생지이자 순국지인 현 위치로 옮겼고 그앞에 강당인 용동서원<龍洞書院>을 1970년에 지어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양식을 그대로 갖추었다. 송병선 선생은 우암 송시열선생의 9대손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외세의 침략이 물밀듯이 다가와서 국가의 존망과 유교의 앞날이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구국<救國>과 위정척사<衛正斥邪>를 펴기 위해 근사속록<近思續錄>을 간행·배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상경하여 고종에게 조약을 파기하고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진언하였고, 그 실행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다시 대궐에 나가려다 일본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기차에 실려 대전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통탄한 나머지 을사오적의 처단과 국권의 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음독 순국<飮毒 殉國>하였다. 송병순선생은 고종25년(1888) 학행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얼마후 사퇴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8도에 돌렸으며, 1910년 망국<亡國>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며 두문불출하였고 일제의 온갖 회유도 마다한 채 끝내 형의 뒤를 따라 음독 자결하였다.
문충사는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며 순국선열인 송병선<宋秉璿 : 1836-1905>·송병순<宋秉珣 : 1839-1912) 형제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원래는 1908년 충북 영동에 세워져 있었는데, 송병선 선생의 순국 60년 기념사업으로 1966년 선생의 탄생지이자 순국지인 현 위치로 옮겼고 그앞에 강당인 용동서원<龍洞書院>을 1970년에 지어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양식을 그대로 갖추었다. 송병선 선생은 우암 송시열선생의 9대손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외세의 침략이 물밀듯이 다가와서 국가의 존망과 유교의 앞날이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구국<救國>과 위정척사<衛正斥邪>를 펴기 위해 근사속록<近思續錄>을 간행·배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상경하여 고종에게 조약을 파기하고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진언하였고, 그 실행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다시 대궐에 나가려다 일본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기차에 실려 대전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통탄한 나머지 을사오적의 처단과 국권의 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음독 순국<飮毒 殉國>하였다. 송병순선생은 고종25년(1888) 학행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얼마후 사퇴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8도에 돌렸으며, 1910년 망국<亡國>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며 두문불출하였고 일제의 온갖 회유도 마다한 채 끝내 형의 뒤를 따라 음독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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