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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효자정려비 - 나라에서 풍속을 권장..충신, 효자, 열녀 등 모범에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 산 83

정려< 旌閭 >는 나라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하여 충신, 효자, 열녀 등 모범에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집 앞에 정문< 旌門 >을 세워 기리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문< 旌門 >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高麗 > 태조< 太祖 >가 삼국< 三國 >을 통일한 뒤 공신< 功臣 >을 표창하면서 서당을 짓도록 하고, 사당 앞에 정문을 세워 그 공을 표창한 것이 기록상 최초이다. 

효자< 孝子 >와 열녀< 烈女 >에 대한 정문은 세종< 世宗 > 13년(1431) 강원감사 고약해< 高若海 >의 주청에 의하여 이듬해 9월에 실시한 것이 처음이다. 경상도< 慶尙道 >의 효자< 孝子 >, 열녀< 烈女 >에 대해서는 단종< 端宗 > 즉위원년< 卽位元年 >(1452) 윤< 閏 >9월< 月 >에 10수인< 數人 >을 정표한 일이 처음으로 보인다. 정문에 대한 절차와 제도가 조선초기에는 장엄하고 복잡하였으나 후기가 되면서 정려를 받을 사람이 늘어나고 심사규정도 완화되자, 정려에 대한 제도도 점차 간소화되어 홍살문만 세워도 되기에 이르렀다. 

박구< 朴矩 >(?∼1425(세종 7)는 호는 동천< 東川 >이며 본관은 함양< 咸陽 >이다. 시조 선< 善 >의 12세손이며 원택< 元擇 >의 이자< 二子 >로 경상도< 慶尙道 > 성주부< 星州府 > 오도지리< 吾道旨里 >(성주군< 星州郡 > 선남면< 船南面 > 대곡리< 大谷里 >)에서 태어났다. 

왕조실록< 王朝實錄 >에 의하면 태종시< 太宗時 >에 상호군< 上護軍 >(태종 7), 의주목사< 義州牧使 >(태종 7), 의주병마사< 義州兵馬使 >(태종 8), 예조참의< 禮曺參議 >(태종 10), 청주절제사< 靑州節制使 >(태종 11), 강원도병마부절제사< 江原道兵馬都節制使 >(태종 13), 강계병마도절제사< 江界兵馬都節制使 > 겸 판강계도호부사< 判江界都護府事 >(태종 17), 세종시< 世宗時 >에 별시위절제사< 別侍衛節制使 >(세종 3),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 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 >(세종 4), 좌군총제< 左軍總制 >(세종 5)를 역임하였다. 또 ‘세종< 世宗 > 7년 4월 12일 전 좌군총제< 左軍總制 > 박구< 朴矩 >가 졸하였으므로 전례에 의하여 부의를 주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 성주목< 星州牧 >조에 ‘벼슬이 가정< 嘉靖 > 도총제< 都總制 >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한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들리매 정려하였다 ’고 있다. 

이원정< 李元禎 >(1662(광해군< 光海君 >14)∼1680(숙종< 肅宗 >6))이 편술한 동산지< 京山志 >에 의하면 ‘박구< 朴矩 >는 규< 規 >의 아우로 관< 官 >이 가정대부 도총제에 이르렀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삼년을 시묘살이를 할 때 삼년동안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는데, 려< 閭 >는 오도종촌< 吾道宗村 > 남천가에 있다. 그의 후손이 한미하여 선남촌< 船南村 >에 살고 있다. 그가 예조참의< 禮曺參議 >였다는 교지가 지금도 집에 전한다 ’고 있고, 성산지< 星山誌 >에는 ‘박구는 규의 아우이다. 

벼슬이 가선대부< 嘉善大夫 > 도총제< 都總制 > 예조우참의< 禮曺右參議 >에 이르렀다. 그의 모가 돌아가심에 시묘살이할 때에 삼년동안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다. 명종< 明宗 >이 예조판서< 禮曺判書 >로 증직하고, 예관< 禮官 >을 보내어 치제< 致祭 >하였다고 ’고 있다. 

함양박씨< 咸陽朴氏 > 신천세고< 新川世攷 > 판서공정려비기< 判書公旌閭碑記 >와 판서공실적< 判書公實蹟 >에 의하면 ‘중종< 中宗 >30년(1535)에 정려가 내리고, 동시에 ‘삼년거려< 三年居廬 > 일불도가< 一不到家 > ’라는 8자< 字 >를 하사하였다. 

판서공< 判書公 >의 산소는 성주군< 星州郡 > 선남면< 船南面 > 화경산< 華鏡山 >에 있는데 지금의 선남면< 船南面 > 대곡동< 大谷洞 >이며 정려각< 旌閭閣 >은 처음에 묘소 남쪽 오리< 五里 >지점인 백천< 白川 >가에 있었으나 홍수< 洪水 >로 인하여 침몰된 것을 11대손 성즙< 聖楫 >이 정조< 正祖 >10년 병오< 丙午 >에 광령산< 廣寧山 > 기슭에서 이건하였다가 또다시 풍우로 퇴이한 것을 무인년< 戊寅年 >(1818)에 현재의 선남면< 船南面 > 도성리< 道成里 > 못뚝마을 동구밖에 중건하였다 ’고 한다. 

또 명종< 明宗 >이 내린 치제문< 致祭文 >은 ‘문이친몰< 聞爾親歿 > 진기자도< 盡其子道 > 전례조석< 奠醴朝夕 > 육재애호< 六載哀號 > 수무부모< 誰無父母 > 이진효성< 爾盡孝誠 > 감발령기< 感發寧己 > 중심시노< 中心是勞 > 자유예관< 玆遺禮官 > 왕전숙년< 往奠宿年 > ’이라는 40자< 字 >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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