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시 신봉동 동아아파트 1동 306호
이 책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인조< 仁祖 > 때의 학자< 學者 >이며 문신< 文臣 >인 검간< 黔澗 > 조정< 趙靖 >이 임란< 壬亂 > 당시에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은 자필일기< 自筆日記 >와 문견록< 聞見錄 >으로 선조< 宣祖 >25년< 年 > 임진< 壬辰 >(1592) 4월< 月 >14일< 日 >부터 동왕< 同王 >30년< 年 > 정유< 丁酉 >(1597) 3월< 月 >까지 약< 約 > 6년간< 年間 > 사실< 事實 >이 수록< 收錄 >되어 있다. 저자< 著者 > 조정< 趙靖 >은 자< 字 >는 안중< 安仲 >, 호< 號 >는 검간< 黔澗 >, 본관< 本貫 >은 풍양< 豊壤 >, 광헌< 光憲 >의 아들, 김성일< 金誠一 >·정구< 鄭逑 >의 문인< 門人 >. 선조< 宣祖 >25년< 年 >(1592) 왜적이 침구하자 함창< 咸昌 > 황영사< 黃嶺寺 >에서 창의< 倡義 >하여 이봉< 李逢 >의 좌막< 佐幕 >이 되고, 뒤에 순찰사< 巡察使 > 김성일< 金誠一 >, 안동수성장< 安東守城將 > 김용< 金涌 >등에게 찾아가 토적< 討賊 >에 관해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창의장< 倡義將 > 이봉< 李逢 >의 대신< 代身 >으로 보은< 報恩 >에 가서 제의장< 諸義將 >과 의학< 義學 >에 관해 정약< 定約 >하였다. 선조< 宣祖 >29년< 年 >(1596)에 도체찰사< 都體察使 > 이원익< 李元翼 >의 막하종사< 幕下從事 >로 활약하였고, 이듬해에 기원< 基遠 > ·영원< 榮遠 > 두 아들을 화왕산성< 火旺山城 >에 보내어 창의< 倡義 >하게 하였다. 선조 32년< 年 >(1599)에 희능참봉< 禧陵參奉 >에 임명되어 광흥창< 廣興倉 > ·군기사< 軍器寺 >의 주박< 主薄 > 등을 지냈다. 선조 36년< 年 >(1603) 사마시< 司馬試 >에 합격, 호조좌랑< 戶曹佐郞 >을 지내고, 선조 38년< 年 >(1605) 증광문과< 增廣文科 >에 급제하여 겸춘추기사관< 兼春秋記事官 >이 되고 사헌부감찰< 司憲府監察 > ·예조좌랑< 禮曹佐郞 > ·대구판관< 大邱判官 > ·경주교수< 慶州敎授 >를 지냈다. 이어 해남현감< 海南縣監 > ·공홍도도사< 公洪道都事 > ·청도군수< 淸道郡守 >등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다. 인조반정후< 仁祖反正後 >에 김제군수< 金堤郡守 >를 지내고 이괄< 李适 >의 난< 亂 > 때에는 왕< 王 >을 공주< 公州 >로 호종< 扈從 >하였다. 1626년< 年 >에 내섬사정< 內贍寺正 >을 지내고 이듬해 봉상사정< 奉常寺正 >으로 전직하였으며, 1632년< 年 >에 군자감정< 軍資監正 >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 仁祖 >20년< 年 >(1642)에 이조참판< 吏曹參判 >에 증직< 贈職 >되고 영조< 英祖 >6년< 年 >(1730)에 상주< 尙州 >의 속수서원< 涑水書院 >에 추정< 追亭 >되었다. 시문< 詩文 >을 모은 검간집< 黔澗集 >과 자필본< 自筆本 >인 임란일기< 壬亂日記 > 7책이 전한다. 이 초고< 草稿 > 일기< 日記 >는 총 7책인데, 임란일기< 壬亂日記 > 상< 上 >·하< 下 > 2책, 남행록< 南行錄 >, 진사록< 辰巳錄 >, 일기일부잡록< 日記一附雜錄 >, 서행일기< 西行日記 >, 각 1책 등 일기< 日記 > 6책과 문견록< 聞見錄 > 1책 도합< 都合 > 7책이다.
임난< 壬亂 >에 관한 기록< 記錄 >으로는 이순신< 李舜臣 >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 유성룡< 柳成龍 >의 「징비록< 懲毖錄 >」, 조경남< 趙慶男 >의 「난중잡록< 亂中雜錄 >」(전북유형문화재< 全北有形文化財 > 107호< 號 >), 이탁영의 「정만록< 征蠻錄 >」(보물 880호), 신경< 申炅 >의 「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 >」, 이노< 李魯 >의 「용사일기< 龍蛇日記 >」(보물 905호, 일괄< 一括 >) 등 수십 종에 달하고 자필본< 自筆本 >으로는 「난중일기< 亂中日記 >」(국보 76호), 「징비록< 懲毖錄 >」(국보 132호)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이 조정< 趙靖 >의 임난일기< 壬亂日記 >은 임난< 壬亂 >이 일어난 4월< 月 >14일< 日 >부터 기필< 起筆 >하여 중간< 中間 >에 누락< 누락 >되기는 하였으나 정유년< 丁酉年 >(1597)까지 약< 約 > 6년간< 年間 >630일< 日 >의 기사< 記事 >가 수록< 收錄 >되었다. 특히 임진년< 壬辰年 >의 기사< 記事 >는 중간에 10일간< 日間 > 결기< 缺記 >된(일실< 逸失 >)것을 제외하고는 4월< 月 >14일< 日 >부터 12월< 月 >27일< 日 >까지 완전하게 적혀 있으며, 계사년< 癸巳年 >의 기사< 記事 >도 전사< 轉寫 >한 것이기는 하나, 임진12월<壬辰 >24일< 日 >에서 계사< 癸巳 > 11월< 月 >7일< 日 >까지 결기< 缺記 >없이 완전< 完全 >하게 기록< 記錄 >되어 있어 어느 임난일기< 壬亂日記 >보다 충실하고 자세하다. 이는 당시 사회상< 社會相 >, 조야< 朝野 >의 실상< 實相 >, 군대< 軍隊 >의 배치상황< 配置狀況 >, 의병< 義兵 >의 활동상< 活動相 >등을 살필 수 있는 임난사연구< 壬亂史硏究 >의 귀중한 사료< 史料 >이며, 저자< 著者 >의 능숙한 필체< 筆體 > 또한 문화재적가치< 文化財的價値 >를 더해준다.
이 책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인조< 仁祖 > 때의 학자< 學者 >이며 문신< 文臣 >인 검간< 黔澗 > 조정< 趙靖 >이 임란< 壬亂 > 당시에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은 자필일기< 自筆日記 >와 문견록< 聞見錄 >으로 선조< 宣祖 >25년< 年 > 임진< 壬辰 >(1592) 4월< 月 >14일< 日 >부터 동왕< 同王 >30년< 年 > 정유< 丁酉 >(1597) 3월< 月 >까지 약< 約 > 6년간< 年間 > 사실< 事實 >이 수록< 收錄 >되어 있다. 저자< 著者 > 조정< 趙靖 >은 자< 字 >는 안중< 安仲 >, 호< 號 >는 검간< 黔澗 >, 본관< 本貫 >은 풍양< 豊壤 >, 광헌< 光憲 >의 아들, 김성일< 金誠一 >·정구< 鄭逑 >의 문인< 門人 >. 선조< 宣祖 >25년< 年 >(1592) 왜적이 침구하자 함창< 咸昌 > 황영사< 黃嶺寺 >에서 창의< 倡義 >하여 이봉< 李逢 >의 좌막< 佐幕 >이 되고, 뒤에 순찰사< 巡察使 > 김성일< 金誠一 >, 안동수성장< 安東守城將 > 김용< 金涌 >등에게 찾아가 토적< 討賊 >에 관해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창의장< 倡義將 > 이봉< 李逢 >의 대신< 代身 >으로 보은< 報恩 >에 가서 제의장< 諸義將 >과 의학< 義學 >에 관해 정약< 定約 >하였다. 선조< 宣祖 >29년< 年 >(1596)에 도체찰사< 都體察使 > 이원익< 李元翼 >의 막하종사< 幕下從事 >로 활약하였고, 이듬해에 기원< 基遠 > ·영원< 榮遠 > 두 아들을 화왕산성< 火旺山城 >에 보내어 창의< 倡義 >하게 하였다. 선조 32년< 年 >(1599)에 희능참봉< 禧陵參奉 >에 임명되어 광흥창< 廣興倉 > ·군기사< 軍器寺 >의 주박< 主薄 > 등을 지냈다. 선조 36년< 年 >(1603) 사마시< 司馬試 >에 합격, 호조좌랑< 戶曹佐郞 >을 지내고, 선조 38년< 年 >(1605) 증광문과< 增廣文科 >에 급제하여 겸춘추기사관< 兼春秋記事官 >이 되고 사헌부감찰< 司憲府監察 > ·예조좌랑< 禮曹佐郞 > ·대구판관< 大邱判官 > ·경주교수< 慶州敎授 >를 지냈다. 이어 해남현감< 海南縣監 > ·공홍도도사< 公洪道都事 > ·청도군수< 淸道郡守 >등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다. 인조반정후< 仁祖反正後 >에 김제군수< 金堤郡守 >를 지내고 이괄< 李适 >의 난< 亂 > 때에는 왕< 王 >을 공주< 公州 >로 호종< 扈從 >하였다. 1626년< 年 >에 내섬사정< 內贍寺正 >을 지내고 이듬해 봉상사정< 奉常寺正 >으로 전직하였으며, 1632년< 年 >에 군자감정< 軍資監正 >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 仁祖 >20년< 年 >(1642)에 이조참판< 吏曹參判 >에 증직< 贈職 >되고 영조< 英祖 >6년< 年 >(1730)에 상주< 尙州 >의 속수서원< 涑水書院 >에 추정< 追亭 >되었다. 시문< 詩文 >을 모은 검간집< 黔澗集 >과 자필본< 自筆本 >인 임란일기< 壬亂日記 > 7책이 전한다. 이 초고< 草稿 > 일기< 日記 >는 총 7책인데, 임란일기< 壬亂日記 > 상< 上 >·하< 下 > 2책, 남행록< 南行錄 >, 진사록< 辰巳錄 >, 일기일부잡록< 日記一附雜錄 >, 서행일기< 西行日記 >, 각 1책 등 일기< 日記 > 6책과 문견록< 聞見錄 > 1책 도합< 都合 > 7책이다.
임난< 壬亂 >에 관한 기록< 記錄 >으로는 이순신< 李舜臣 >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 유성룡< 柳成龍 >의 「징비록< 懲毖錄 >」, 조경남< 趙慶男 >의 「난중잡록< 亂中雜錄 >」(전북유형문화재< 全北有形文化財 > 107호< 號 >), 이탁영의 「정만록< 征蠻錄 >」(보물 880호), 신경< 申炅 >의 「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 >」, 이노< 李魯 >의 「용사일기< 龍蛇日記 >」(보물 905호, 일괄< 一括 >) 등 수십 종에 달하고 자필본< 自筆本 >으로는 「난중일기< 亂中日記 >」(국보 76호), 「징비록< 懲毖錄 >」(국보 132호)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이 조정< 趙靖 >의 임난일기< 壬亂日記 >은 임난< 壬亂 >이 일어난 4월< 月 >14일< 日 >부터 기필< 起筆 >하여 중간< 中間 >에 누락< 누락 >되기는 하였으나 정유년< 丁酉年 >(1597)까지 약< 約 > 6년간< 年間 >630일< 日 >의 기사< 記事 >가 수록< 收錄 >되었다. 특히 임진년< 壬辰年 >의 기사< 記事 >는 중간에 10일간< 日間 > 결기< 缺記 >된(일실< 逸失 >)것을 제외하고는 4월< 月 >14일< 日 >부터 12월< 月 >27일< 日 >까지 완전하게 적혀 있으며, 계사년< 癸巳年 >의 기사< 記事 >도 전사< 轉寫 >한 것이기는 하나, 임진12월<壬辰 >24일< 日 >에서 계사< 癸巳 > 11월< 月 >7일< 日 >까지 결기< 缺記 >없이 완전< 完全 >하게 기록< 記錄 >되어 있어 어느 임난일기< 壬亂日記 >보다 충실하고 자세하다. 이는 당시 사회상< 社會相 >, 조야< 朝野 >의 실상< 實相 >, 군대< 軍隊 >의 배치상황< 配置狀況 >, 의병< 義兵 >의 활동상< 活動相 >등을 살필 수 있는 임난사연구< 壬亂史硏究 >의 귀중한 사료< 史料 >이며, 저자< 著者 >의 능숙한 필체< 筆體 > 또한 문화재적가치< 文化財的價値 >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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