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
신재효 고택의 사랑채이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 ∼ 1884)가 여생을 마치던 1884년까지 기거하였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채의 건물들이 한 곽(廓)을 이루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조촐한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건물은 국권상실 이후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고창 경찰서의 관사로 이용되었다.
이때 지붕이 함석으로 개조되고 이용에 편리하도록 건물의 구조가 개조되거나 첨삭되었다고 마을의 고로(古老)들이 증언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국가에서 옛모습을 되찾고자 개조된 부분을 상당히 수정한 것이다.
건물은 초가지붕인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이며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집 뒷편에는 원래 연못이 있었으나 연못은 메워지고 그 자리에 고창경찰서가 들어서 있다. 고창경찰서는 동리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은 이전하고 건물만 남아있다.
얼마전까지 멋들어지게 용틀임을 하고 있던 향나무는 지금은 말라죽어 형체만 남아있는데 이 나무는 제아무리 지체높은 이라도 허리를 굽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도록 키를 낮추어 놓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건물 왼쪽 뒷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평면구성은 건물의 왼쪽으로부터 부엌 1칸, 온돌방 2칸, 대청 1칸, 2칸통의 올돌방으로 되어 있고 부엌을 제외한 전면의 5칸은 우물마루로 꾸민 반칸 너비의 퇴로 연결된다.
구조는 낮은 기단위에 막돌 덤벙 주초를 놓고 앞쪽의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3량가(三樑架)이다.
이 건물은 부엌벽을 심벽(心壁, 흙만 가지고 쌓아올린 토언제(土堰堤) 따위에서 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진흙따위로써 만들어 그 심에 넣은 벽체)으로 처리하고 부엌과 온돌방 사이의 개구부에 비교적 너비가 넓은 쌍여닫이 출입문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신재효 고택의 사랑채이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 ∼ 1884)가 여생을 마치던 1884년까지 기거하였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채의 건물들이 한 곽(廓)을 이루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조촐한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건물은 국권상실 이후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고창 경찰서의 관사로 이용되었다.
이때 지붕이 함석으로 개조되고 이용에 편리하도록 건물의 구조가 개조되거나 첨삭되었다고 마을의 고로(古老)들이 증언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국가에서 옛모습을 되찾고자 개조된 부분을 상당히 수정한 것이다.
건물은 초가지붕인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이며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집 뒷편에는 원래 연못이 있었으나 연못은 메워지고 그 자리에 고창경찰서가 들어서 있다. 고창경찰서는 동리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은 이전하고 건물만 남아있다.
얼마전까지 멋들어지게 용틀임을 하고 있던 향나무는 지금은 말라죽어 형체만 남아있는데 이 나무는 제아무리 지체높은 이라도 허리를 굽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도록 키를 낮추어 놓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건물 왼쪽 뒷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평면구성은 건물의 왼쪽으로부터 부엌 1칸, 온돌방 2칸, 대청 1칸, 2칸통의 올돌방으로 되어 있고 부엌을 제외한 전면의 5칸은 우물마루로 꾸민 반칸 너비의 퇴로 연결된다.
구조는 낮은 기단위에 막돌 덤벙 주초를 놓고 앞쪽의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3량가(三樑架)이다.
이 건물은 부엌벽을 심벽(心壁, 흙만 가지고 쌓아올린 토언제(土堰堤) 따위에서 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진흙따위로써 만들어 그 심에 넣은 벽체)으로 처리하고 부엌과 온돌방 사이의 개구부에 비교적 너비가 넓은 쌍여닫이 출입문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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