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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계서당 - 주택(住宅) 발달사(發達史) 연구(硏究)의 좋은 자료(資料)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의 문신< 文臣 > 계서< 溪西 > 성이성< 成以性 >(1595∼1664)은 창녕인< 昌寧人 >으로 남원< 南原 > 부사< 府使 >를 지낸 부용당< 芙蓉堂 > 성안의< 成安義 >의 자제< 子弟 >이며 인조< 仁祖 > 5년< 年 >(1627) 문과< 文科 >에 급제한 후 진주< 晋州 > 부사< 府使 > 등 6개< 個 >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세차례나 어사< 御使 >로 등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마음이 아울러 검소하여 훗날에 부제학< 副提學 >을 추서< 追敍 >받았으며 청백리< 淸白吏 >로 이름이 높았다. 본< 本 > 건물< 建物 >은 그가 광해군< 光海君 >5년< 年 >(1613)에 건립< 建立 >하였다고 전< 傳 >하는데 사랑채 부분< 部分 >은 후대< 後代 >에 증개축< 增改築 >된 것으로 추측된다. 후방< 後方 >의 숲이 우거진 동산을 배경으로 건물< 建物 >을 남향< 南向 >으로 배치< 配置 >하였다. 솟을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논의 가장자리 평지< 平地 >에 세웠으나 몸채는 뒷동산의 경사진 산록에 올려놓아 우뚝하게 솟아 보이고 앞쪽의 논들을 부감< 俯瞰 >할 수 있으며, 우측< 右側 >으로 10여< 餘 >미터 떨어져서 일곽< 一廓 >의 토담을 두르고 사당을 배치< 配置 >하였다. 안채 부분을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정면< 正面 > 3간< 間 > 대청< 大廳 >의 좌우< 左右 >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놓여져 있고 이 안방과 상방의 뒤쪽에는 각각 반간< 半間 >크기의 도장방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대청< 大廳 >의 좌측간< 左側間 > 즉 안방 측간< 側間 >의 뒤쪽에도 안방의 것과 같은 크기의 도장방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 마루의 기둥에 걸린 상방< 上枋 >에는 고미받이를 걸치고 고미혀를 끼웠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기둥의 측면< 側面 >에는 가시새를 설치하여 벽을 쳤던 자국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 마루 1간< 間 >은 원래는 온돌방으로 안방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방 부엌은 마당쪽으로 2간통< 間通 >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 中門間 >이 있는 앞채와 직교< 直交 >하였으며 상방 앞의 부엌은 간반< 間半 >을 내밀어 사랑채 부분< 部分 >과는 1m 가량 틈을 두었다. 안대청< 大廳 > 상부< 上部 >는 오량가< 五樑架 >로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세웠고 기둥은 방주< 方柱 >에 자연석< 自然石 > 주초< 柱礎 >를 놓았다. 앞채의 중문간은 사랑채와 연접< 連接 >하였고 좌측< 左側 >에는 고방 2간< 間 >이 배치< 配置 >되었으며 좌단< 左端 >의 모방 1간< 間 >이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 부분< 部分 >은 전면< 前面 > 3간< 間 >, 측면< 側面 > 3간< 間 >의 9간< 間 >집으로 전면< 前面 > 3간< 間 >과 우측면< 右側面 > 2간< 間 >에 ㄴ자형< 字形 >의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 바깥으로 헌함을 돌렸다. 마루의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웃방 등을 배치하여 구색을 갖추었으며 마루의 양측면< 兩側面 >은 널벽으로 꾸미고 각< 各 > 간< 間 >에 널문을 달았다. 사랑채의 정면< 正面 >은 누< 樓 >다락같이 꾸몄는데 누하< 樓下 > 방주< 方柱 > 사이는 잡석쌓기 위에 토벽을 쳐서 막았고 누상< 樓上 > 방주< 方柱 >의 머리에는 주두< 柱頭 >를 놓았으며 퇴보와 결구된 처마도리 밑에는 둔중< 鈍重 >한 모양의 첨차를 놓았다. 마루 상부< 上部 > 천장은 합각 밑에만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이 집의 안채부분은 경북< 慶北 > 북부지방< 北部地方 > ㅁ자< 字 > 민가< 民家 >의 고태< 古態 >를 간직하고 있으며 약간 변형은 되었으나 복원 가능< 可能 >한 상태< 狀態 >로서 주택< 住宅 > 발달사< 發達史 > 연구< 硏究 >의 좋은 자료< 資料 >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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