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촌1,3리 148
쌍벽당< 雙碧堂 > 김언구< 金彦球 >는 조선< 朝鮮 > 연산군조인< 燕山君朝人 >으로 그의 부친< 父親 > 습독공< 習讀公 > 김균< 金筠 >이 풍산< 豊山 >의 구담< 九潭 >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았으며 생원공< 生員公 > 김언구< 金彦球 >는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뜰에 솔과 대나무를 심으며 거문고를 즐겼는데 호< 號 >는 송죽< 松竹 >이라 하였다. 별당< 別堂 >에 걸려있는 쌍벽당< 雙碧堂 > 중수기< 重修記 >에 보면 정종< 正宗 >을 지낸 홍공< 洪公 >이라는 이가 쓴 편액< 扁額 >에는 건물< 建物 >의 창건년대< 創建年代 >가 가청병인< 嘉請丙寅 >(1566년< 年 >)이라 기록< 記錄 >되어 있었다 하며, 1864년< 年 > 토사공< 土舍公 >이 남익< 南翼 > 3간< 間 >을 수선< 修繕 >하였고, 1892년< 年 > 그의 손자< 孫子 > 용정< 容正 >이 안채를 크게 수리< 修理 >하면서 외당< 外堂 >을 별도< 別途 >로 세웠다고 하였으니 지금 쌍벽당< 雙碧堂 >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 別堂 >은 이때 건축< 建築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옥< 家屋 >은 10여호의 민가< 民家 >가 집락을 이루고 있는 완만한 경사지< 傾斜地 >의 뒤편에 낮은 야산< 野山 >을 배경< 背景 >으로 남향< 南向 >하여 넓게 터를 잡았다. 행랑채에 우뚝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 左側 >의 안채와 우측< 右側 > 별당< 別堂 >의 정면< 正面 >이 보이고, 별당< 別堂 >의 후방< 後方 >에 방형< 方形 >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 祠堂 >을 배치< 配置 >하였다. ㅁ자형< 字形 >의 안채(정침< 正寢 >)는 앞채의 좌우< 左右 >로 양익< 兩翼 >이 1간< 間 >씩 돌출< 突出 >하였다. 중문간< 中門間 > 우측< 右側 >에 툇마루와 2간통< 間通 >의 사랑윗방 그리고 우단< 右端 >에 전면< 前面 >이 개방< 開放 >된 마루 1간< 間 >을 배치하고 사랑웃방 뒤에 사랑아랫방 단간< 單間 >을 설치하여 사랑부분< 部分 >을 구성< 構成 >하였으며, 중문간< 中門間 > 좌측< 左側 >에는 고방 1간< 間 >과 2간통< 間通 > 아랫방을 배치< 配置 >하여 ㅁ자< 字 >집의 앞채를 이루었다. 중문< 中門 >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正面 > 3간< 間 >의 대청< 大廳 >이 안마당폭< 幅 > 가득히 안채의 중앙< 中央 >에 자리잡았다. 이 안채의 대청< 大廳 >은 낮은 잡석기단위에 있지만 큼직한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위에 주택< 住宅 >에서는 보기드문 굵고 높은 원주< 圓柱 >를 사용< 使用 >하고 있어 지붕이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인다. 대청< 大廳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오량가< 五樑架 >로 종보위에 키가 높은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세워 놓았다. 대청< 大廳 >의 좌측< 左側 >에는 도장방과 안방이, 우측< 右側 >에는 고방과 상방이 대칭적< 對稱的 >으로 배치< 配置 >되어서 경북지방< 慶北地方 >의 고식< 古式 >을 보이고 있으며 중수기< 重修記 >에 1892년< 年 >의 수리시< 修理時 > 창호< 窓戶 >를 모두 새로 만들었다고 기록< 記錄 >되어 있으나 대청< 大廳 > 뒷벽의 양개< 兩開 >널문에 중간설주를 세운 형식< 形式 >이 그대로 유존< 遺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구제< 舊制 >를 잘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별당< 別堂 >은 정면< 正面 > 4간< 間 >의 전면< 前面 >에 헌함을 설치하였으며 좌측< 左側 > 1간< 間 >은 통간< 通間 > 온돌< 溫突 >로 꾸미고 나머지 3간< 間 >은 전면< 前面 >이 개방< 開放 >된 대청< 大廳 >이다.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초석< 礎石 >을 놓아 방주< 方柱 >를 세웠고 우물마루를 깐 대청< 大廳 >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오량가< 五樑架 >로 종보위에 파련대공을 올려 놓고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행랑채는 솟을대문< 大門 >의 우측< 右側 >에 고방과 방이 각< 各 > 1간< 間 >씩 설치되었고 좌측< 左側 >에는 고방 2간< 間 >과 방 및 부엌이 각각 1간< 間 >씩 배치< 配置 >되었다. 본< 本 > 가옥< 家屋 >은 조선< 朝鮮 > 초기말경< 初期末頃 >에 건축< 建築 >된 것으로 추측되며 후대< 後代 >에 양차< 兩次 >에 걸쳐 중수< 重修 >를 하였으나 평면< 平面 >과 구조< 構造 >의 중요부< 重要部 >는 비교적 구제< 舊制 >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조선시대< 朝鮮時代 > 주택연구< 住宅硏究 >의 자료< 資料 >가 될 유구< 遺構 >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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