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1·3리 485
이 가옥은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의 문신< 文臣 > 만회< 晩悔 > 김건수< 金建銖 >(1790∼1854)가 살던 집으로 그는 순조< 純祖 >30년< 年 >(1830)에 정시< 庭試 >로 등제< 登第 >한 후에 봉화< 奉化 > 감< 縣監 >, 김해< 金海 > 부사< 府使 > 등을 거쳐 승정원< 承政院 > 우부승지< 右副承旨 >까지 지냈다. 이 건물< 建物 >의 안채는 만회< 晩悔 >의 6대조< 代祖 >가 이곳에 정착하여 선주< 先住 >하던 여씨< 余氏 >에게서 매입< 買入 >하였다 하는데 초창년대< 初創年代 >는 알 수 없다. 사랑채인 명월< 明月 > 누< 樓 >는 만회< 晩悔 >가 건립< 建立 >하였는데 철종< 哲宗 > 원년< 元年 >(1850)에 중수< 重修 >한 적이 있고, 안채 앞의 중문간채는 기울어져서 1981년< 年 > 임시로 철거하였다. 이 집은 마을의 우측< 右側 > 깊숙한 곳에 숲이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 南向 >하여 건물< 建物 >을 앉혔다. 골목어귀 수목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의 정면< 正面 >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으며 우측< 右側 >에 돌출< 突出 >한 누각< 樓閣 >의 합각지붕 추녀 곡선은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수목에 가려서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 建物 >이 매우 퇴락한 상태에 있다. 안채는 □형< 形 >으로 남향< 南向 >하여 배치< 配置 >되고 그 앞에 일자< 一字 > 중문간< 中門間 >채가 놓여져 튼 ㅁ자< 字 >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간< 中門間 >채가 철거되어서 현재< 現在 >는 내정< 內庭 >의 남쪽이 터진 상태이다. 안채의 중앙< 中央 >은 3간< 間 > 대청< 大廳 >이 차지하였는데 어간< 御間 >의 기둥 간격이 양협간< 兩夾間 >보다 넓게 배치< 配置 >되어 있다. 대청< 大廳 > 좌우< 左右>의 익사< 翼舍 >에는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 配置 >되었는데, 좌측< 左側 >의 안방 위쪽 웃방은 바닥이 널마루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온돌방이었고 이 방에서 도장방을 출입하게 되어있다. 대청< 大廳 > 우측< 右側 >에는 상방 위쪽에 장고방이 설치되어 있고, 마당쪽으로는 상방부엌을 건너 건넌방이 1간< 間 > 놓여져 있다. 안채의 구조< 構造 >는 잡석< 雜石 > 축대 위에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을 놓아 방주< 方柱 >를 세웠고 전면< 前面 >이 개방< 開放 >된 대청< 大廳 >의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삼량가< 三樑家 >로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올린 간략한 구조< 構造 >다. 대청< 大廳 > 뒷벽 각간< 各間 >의 중방 하부< 下部 >에는 판벽< 板璧 >을 꾸미고 중앙< 中央 >에 양개< 兩開 > 널문을 내었는데, 여는 것과 다르게 쌍미닫이 널문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전면주< 前面柱 >만 원주< 圓柱 >를 사용< 使用 >하였다. 정면< 正面 > 4간중< 間中 > 좌측< 左側 > 3간< 間 >은 후면< 後面 >에 2간통< 間通 > 사랑방과 사랑마루 1간< 間 >을 배설하고 전면< 前面 >에는 툇마루를 배치< 配置 >하며 기둥 밖으로 헌함을 설치하였다. 우측< 右側 > 1간< 間 >은 후면< 後面 >에 뒤쪽으로 길게 간반< 間半 > 크기의 온돌방을 배설하고 그 뒤에 반간< 半間 > 크기의 감실방을 두었다. 전면< 前面 >쪽은 누< 樓 >마루를 돌출< 突出 >시키고 외부< 外部 >쪽 3면벽< 面壁 >을 판벽< 板璧 >으로 꾸며 두짝열개 울거미널문을 각각 설치하여 마루방처럼 꾸몄으며, 3면< 面 > 판벽< 板璧 >의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뽑아서 헌함을 돌렸다. 안채는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 건축< 建築 >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慶北地方 > ㅁ자< 字 >집의 고식< 古式 > 평면배치법< 平面配置法 >이 통< 通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청< 大廳 > 뒷벽의 양개< 兩開 > 널문이 미닫이로 되어있는 점< 點 >도 흔치않는 예< 例 >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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