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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종택 - 구국운동과 관련된 연고(緣故)가 있는 종택으로서 독립운동정신을 기념할 가치...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1·3리 709-1

의성김씨< 義城金氏 > 개암공< 開巖公 > 파손< 派孫 >들이 해저에 들어온 것은 30세< 世 > 연대< 鍊大 >(1753-1800)때 이며, 선주< 先住 >하던 여씨< 余氏 >의 집을 매입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 집이 고택< 古宅 >이라 퇴락하여서 31세< 世 > 우영< 佑永 >(1787-1824)대< 代 >에 중수< 重修 > ·중건< 重建 >하였다 하며, 옥호< 屋號 >는 파조< 派祖 > 우굉< 宇宏 >(1524-1590)의 호< 號 > ‘개암< 開巖 > ’을 따른 것이다. 한편, 이 종택은 소유자의 증조부인 33세< 世 > 창우< 昌禹 >(1854-1937)가 이 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한일합방 후에는 국운을 근심하고 구국운동도 이 집에서 논의한바 있으며, 김창숙지사< 金昌淑志士 >가 주도한 유림단독립정원의거< 儒林團獨立請願義擧 >(일명 파리장서< 巴里長書 > 및 유림단사건< 儒林團事件 >)때 서명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 日帝 >에 항거< 抗拒 >한 내력을 갖인 집이다. 건축현황< 建築現況 >:개암종택은 동서로 긴 바래미마을의 서< 西 >쪽편에 편재< 偏在 >하여서 야산< 野山 >을 배산< 背山 >하고 평지에 남향< 南向 >으로 좌정< 坐定 >하였으며, 대지주변은 토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있는 진입로를 향하여 앉은 3칸 평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격하여 4칸 일< 一 >자 사랑채가 남향으로 앉아 있고 동쪽 끝에 중대문이 한칸 더 붙어 있다. 중대문으로 들어서면 ㅁ자 안채가 안마당을 안고 사랑채 뒤쪽에 근접하여 배치되었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방형< 方形 > 별곽< 別廓 >안에 사당< 祠堂 >을 배설하고 사랑 동쪽마당으로 3문을 두었다. 외측< 外厠 >은 사랑마당 서남우< 西南隅 >에, 내측< 內厠 >은 안마당 서북우< 西北隅 >에 두었다. 대문채:3칸 대문채는 어칸에 대문을 내고 양쪽 퇴칸에는 온돌방을 넣었다. 남쪽 외부에는 고창을 내었고, 사랑마당 쪽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시멘트 몰탈로 마감한 막돌기단의 자연석 초석위에 방주를 세운 3량가구 집이다. 사랑채:전면에 4분합문을 단 1칸 마루방과 동쪽에 접한 2칸통 큰사랑방 앞에는 퇴주를 세우고 툇마루를 두었고, 서쪽 끝에는 작은사랑방을 남북 칸반크기로 배치하고 전면과 서측면에 쪽마루를 돌렸다. 사랑방들의 전면에는 머름중방위에 세 살 양개살문을 달아 툇마루에서 출입케 하였고, 배면에는 처마밑에 반침을 내밀었다. 마루방과 큰사랑방 사이에는 들어열개 불발기 사분합문을 달에 넓게 개방케 하였고, 마루방 뒷벽에는 쌍여닫이 골판문을 닫고 상벽에는 벽감을 설치하였다. 마루방 상부는 천반자를 하여 상부가구를 가렸는데 5량집으로 보인다. 큰사랑방 동단< 東端 >의 중대문칸은 3량가구의 박공지붕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몰탈마감한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방주를 세운 간소한 가구이다. 근년에 상당부분 개조 또는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2칸 안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의 2칸통 안방 앞에 1칸 정지가, 서쪽에 있는 상방 앞에 고방과 아랫상방이 한칸씩 남쪽으로 놓여져 동 ·서 양익< 兩翼 >을 이루고 있다. 안대청은 전면이 개방된 우물마루이고 양익사< 兩翼舍 >의 고방과 안방의 남쪽칸 앞에 설치된 쪽마루와 연결되었으며, 배면은 각칸 널벽 가운데에 널머름을 두고 위에 양개 골판문을 달았다. 안방 앞 부엌 위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안방에서 오르게 하였다. 고방은 연등천장으로 반자가 없으며 우물마루가 껄려서 마루방처럼 사용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몰탈마감한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대청 상부 가구는 3랑가이고 춤이 낮은 사다리꼴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올렸다. 내삼문:자연석 주초위에 방주를 세운 3랑가구 건물이다. 전면의 대문들에는 녹색 바탕에 흰색과 석간주색으로 그렸던 것으로 보이는 원형 태극무늬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당:자연석을 쌓은 기단위에 세워진 사당은 전면 3칸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운 퇴칸이 있고 뒤는 방주를 세운 감실이다. 어칸과 퇴칸에는 각각 양개 및 편개 궁창격자살문을 달았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종보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았다. 이 종택< 宗宅 >은 여< 余 >씨들이 살던 고옥< 古屋 >이었으나 김< 金 >씨들이 이주< 移住 >하면서 1800년대를 전후하여 일부 중수< 重修 > ·개조< 改造 >되었고 사랑채는 1900년대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등 고태< 古態 >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사랑채와 안채가 중문을 경계로 공간구분을 이루고 있고 또 별곽의 사당영역까지 갖추고 있어 종택< 宗宅 >으로서의 배치< 配置 > 및 공간구성< 空間構成 >은 제대로 격식< 格式 >을 유지< 維持 >하고 있다. 따라서 유림단독립청원의거< 儒林團獨立請願義擧 >등 구국운동과 관련된 연고< 緣故 >가 있는 종택으로서 독립운동정신을 기념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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