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사람들은 남해읍 시내를 통과하여 서면방면과 상주방면이 서로 엇갈리는 곳을 효자문 삼거리라 부른다. 이 효자문거리 오른쪽에 작은 기와집이 보인다. 효자 김백렬(1873-1917)의 존영을 모셔 놓고 있는 영모문이다. '효자문'이라고도 부른다. 효자 김백렬은 1873년 6월 24일 남해군 서변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매사에 지극한 성격과 사리분별로 범절이 비상하여 이웃동네에 이르기까지 칭송을 받았다.김백렬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평소에 성훈을 받들어 스스로 실천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섬겨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혹 부모가 병상에 계시면 반드시 자기가 손수 약을 달여서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올려 지성으로 완쾌토록 하였으며, 밤에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평상복을 입은 채 잤다고 한다. 새벽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께 문안드리며 하루의 일을 부모님과 의논하고 승낙을 받아서 했다. 또 부모가 출타하여 안계실 때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제시간에 직접 가서 모셔왔으며, 집안 뜰에 어버이 계실 별당을 지어 깨끗이 단장하고 꽃향기가 풍기게 하여 항상 즐겁게 해 드렸다고 한다. 경상도 관찰사 황철이 1909년에 비단에 '금남선배효자 김백렬씨'라고 자필로 써서 표창했고. 남해군에서도 10여 차례 표창을 했다. 1925년 10월, 영모문을 준공하고 조선말 우의정 윤용구의 글씨로 현판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는 법, 김백렬의 효행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영모문(永募門) - 지극한 효자 김백렬 기린 사당
남해사람들은 남해읍 시내를 통과하여 서면방면과 상주방면이 서로 엇갈리는 곳을 효자문 삼거리라 부른다. 이 효자문거리 오른쪽에 작은 기와집이 보인다. 효자 김백렬(1873-1917)의 존영을 모셔 놓고 있는 영모문이다. '효자문'이라고도 부른다. 효자 김백렬은 1873년 6월 24일 남해군 서변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매사에 지극한 성격과 사리분별로 범절이 비상하여 이웃동네에 이르기까지 칭송을 받았다.김백렬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평소에 성훈을 받들어 스스로 실천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섬겨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혹 부모가 병상에 계시면 반드시 자기가 손수 약을 달여서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올려 지성으로 완쾌토록 하였으며, 밤에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평상복을 입은 채 잤다고 한다. 새벽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께 문안드리며 하루의 일을 부모님과 의논하고 승낙을 받아서 했다. 또 부모가 출타하여 안계실 때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제시간에 직접 가서 모셔왔으며, 집안 뜰에 어버이 계실 별당을 지어 깨끗이 단장하고 꽃향기가 풍기게 하여 항상 즐겁게 해 드렸다고 한다. 경상도 관찰사 황철이 1909년에 비단에 '금남선배효자 김백렬씨'라고 자필로 써서 표창했고. 남해군에서도 10여 차례 표창을 했다. 1925년 10월, 영모문을 준공하고 조선말 우의정 윤용구의 글씨로 현판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는 법, 김백렬의 효행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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