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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사 묘정비 - 남해에 두 번 유배 온 이이명의 귀양살이 흔적

by 넥스루비 2007. 8. 7.

이이명은 일생을 통해 세 차례 귀양살이를 한다. 그 가운데 두 차례는 남해에서 치렀다. 봉천사 묘정비는 바로 그 두 차례 귀양살이의 흔적이다. 남해에 두 번이나 유배되었다면 남해와 인연이 지독하리만치 깊은 사람일 것이다. 남해읍 우회도로 삼거리에서 시외버스 터미널 방향으로 오면, 터미널 맞은편 언덕에 조선 숙종 때 건저사대신(建儲四大臣)의 한 사람인 이이명(1658-1722)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숙종6년(1682)에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인재였다. 숙종15년에 강원감사(종2품)와 승지를 지냈는데 이 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숙종18년(1692)에 남해로 이배되었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되자 죄가 면제되어 1706년에 비변사도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방전략도인 요계관방도를 완성하기도 했다.경종 원년(1721)에 왕세자인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소론파와 권력싸움에 져서 다시 남해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그는 29년전 유배왔던 그 집을 수리하고 머무르면서 지방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켰다. 일설에는 이이명이 역모를 꾸며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목호룡이란 자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1722년에 한강진에서 사약을 받아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안 남해 향사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하며 사당을 짓고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하였던 영정까지 가져와 모셨는데 이것이 봉천사이다. 이이명이 유배지 남해에서 지역민들에게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봉천사는 없어지고 비만 서 있다. 이이명은 세종의 칠대손이며, 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냈고, 아버지가 대사현을 지낸, 이른바 명문 집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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