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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 조선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by 넥스루비 2016. 11. 15.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그 후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탄 원통전을 선조 38년(1605)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숙종 21년(1695)에 현응스님이 삼창하였다. 파계사는 조선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데, 다음의 이야기가 1935년에 세워진 '팔공산파계사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계유년(1693) 시월의 어느날, 임금은 예스럽고 소박하게 생긴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사흘 뒤 상서로운 빛이 궐내를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살펴보도록 하였고 남대문 밖에 쉬고 있던 파계사의 도승(道僧) 영원(靈源)스님을 뵙게 되었다. 숙종은 스님을 불러 손을 잡으며 기뻐하더니 수락산으로 가 칠성님께 왕자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해 갑술년(1694)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는데 이가 바로 영조대왕이다. 을해년(1695) 스님이 돌아올 때 숙종은 '현응(玄應)' 이라는 호를 내리고 두터운 예우로 전송하면서 내탕금을 주어 칠성전(七星殿), 백화루(白花樓)를 짓게 하였다. 이 칠성전이 곧 자응전(慈應殿)이다.

파계사 가는 길

이렇게 맺어진 왕실과의 인연이 조선 왕조 멸망 때까지 줄곧 이어짐으로써 파계사는 유생들의 횡포를 막아낼 수 있었다. 숙종 22년(1696) 왕이 손수 지은 축책(祝冊)을 내려주어 파계사는 왕실의 원당이 되었으며, 숙종 30년(1704) 영조가 열한 살의 나이에 '慈應殿(자응전)'이란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또한 영조 재위시에는 여러 차례 완문(完文)을 내려 양반과 관아의 침탈이 미치지 않도록 하였고, 우의정 이의현을 파견하여 기영각(祈永閣)을 세웠다. 정조 1년(1777)에는 '천향각(天香閣)'이라 쓴 어필 편액을 하사, 순조 31년(1831)에는 왕실에서 미타암을 세워주었고, 철종 11년(1860)년 왕비가 내탕금을 내려줘 백화루를 중수하였으며, 고종 14년(1877)에는 순찰사 박제인이 기영각을 수리하였다. 지금도 파계사에는 현응대사의 비석과 부도, 그리고 영조대왕의 어의가 보관되어 있다.

범종각, 진동루

진동루라 불리는 누각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맞은 편에 파계사의 본전인 원통전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설선당과 적묵당이 위치해 있다. 이 격조 높은 당우 4채가 반듯한 'ㅁ'자형의 중심공간을 형성하고, 원통전 뒤쪽에 기영각과 산령각, 그리고 응향각이 있으며 응향각 동북쪽에 미타전이 있다. 이 밖에 법당 앞의 석등, 원의 전명 현응 등 세 대사의 부도와 비, 숙종의 하사품인 병풍과 구슬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현니암, 금당암, 성전암, 칠성암이 있는데, 그 중 경상북도의 3대 수도도량 중 하나로 각광 받고 있는 성전암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현응의 영정과 벽화가 있다.

약250년된 영조 임금나무

원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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