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805-1
옛 용문서원 유허지에 세워져 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사당비이다.
조선조 5현으로 유림에서 추앙받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임란 10년전인 1583(癸未)에 세우고 갈천(葛川) 임훈(林勳: 1500 - 1584)선생이 글을 짓고, 전자는 유세한(柳世漢), 비문은 석곡 성팽년(成彭年: 1540 - 1594)이 썼다. 옛 사당은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고 뒷산 언덕에 유허비만 남았고, 사당비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수(彦首 : 85 X 100cm), 비신(碑身: 157 X 78 X 24cm) 귀부가 뚜렷하고 보주, 비좌, 이수, 여의주, 구갑문(龜甲紋)의 조각 양식이 정교하고 뚜렷하다.
치갑인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안의 현감에 부임되어 재임 5년만에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종성으로 유배된지 7년만에 卒 한지라 5년간 고을을 다스릴 때 인정을 베풀고 문교를 일으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정성으로 감복케 하자 부자가 함께와서 무사에
조력하였다니 백성들이 선생을 얼마나 추모했는지를 알수 있다.
현감 재임시 백성을 다스리는 법십제조문은 두고 후임자들도 모법으로 삼고 준수하는등 재임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현감 이후와 유림들이 함께 준공하였다 한다.
옛 용문서원 유허지에 세워져 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사당비이다.
조선조 5현으로 유림에서 추앙받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임란 10년전인 1583(癸未)에 세우고 갈천(葛川) 임훈(林勳: 1500 - 1584)선생이 글을 짓고, 전자는 유세한(柳世漢), 비문은 석곡 성팽년(成彭年: 1540 - 1594)이 썼다. 옛 사당은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고 뒷산 언덕에 유허비만 남았고, 사당비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수(彦首 : 85 X 100cm), 비신(碑身: 157 X 78 X 24cm) 귀부가 뚜렷하고 보주, 비좌, 이수, 여의주, 구갑문(龜甲紋)의 조각 양식이 정교하고 뚜렷하다.
치갑인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안의 현감에 부임되어 재임 5년만에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종성으로 유배된지 7년만에 卒 한지라 5년간 고을을 다스릴 때 인정을 베풀고 문교를 일으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정성으로 감복케 하자 부자가 함께와서 무사에
조력하였다니 백성들이 선생을 얼마나 추모했는지를 알수 있다.
현감 재임시 백성을 다스리는 법십제조문은 두고 후임자들도 모법으로 삼고 준수하는등 재임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현감 이후와 유림들이 함께 준공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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