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내원사 입구 국도변에 비석 셋이 서 있는데 그 내력을 모르고서 이 비석을 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비록 한학에 능한 분이 보더라고 영상대감 이유원(領相大監 李裕元)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용연리(龍淵里) 국도변에 세워진 연유를 알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비석 이면에 '구포복설장두 우석규, 서상로, 이기수'(龜浦復設將頭 禹錫奎, 徐相魯, 李基洙)라 씌어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붙어 있지 않으니 비석 전면의 인물과 어떤 관계이며 구포복설(龜浦復設)이란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영상대감 이유원은 특별히 삼인의 의기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에 봉화한 사건은 면책 불문하고 또 구포면은 즉시 양산군에 환속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우석규, 서상로, 이기수 세사람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비석 셋을 세웠으니, 그 첫째가 당시의 영상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 비석 전면에는 '영상대감 이합원 영세불망비(領相大監 李閤元 永世不忘碑) (閤(합)은 閤下(합하)의 준말인데 정일품 관원의 성밑에 붙이는 경칭)라 각자되어 있으며, 그 후면에 '구포복설장두'라 두서하고 삼인의 성명만이 병기되어 있다. 삼인만의 비석을 마땅히 따로 건립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영상의 비석 뒷면에 붙인 것은 관직이 없는 사람은 비석을 세울 수 없는 당시의 법 때문에 영상 비석 뒷면에 각자하여 그 공적을 더욱 빛나게 남기려는 의도에서이다.
둘째 비석은 복설 당시의 군수를 기린 비석이니, '행군수어공윤중영세불망비(行郡守漁公允中永世不忘碑)'라 씌어 있고 또, 하나는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를 기린 것이니 '행군수이공능화애민선정비(行郡守李公能華愛民善政碑)'라 씌어 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후손은 현재 하북면 삼감리와 상북면 좌삼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이 비석을 용연리 국도변에 건립한 것은 필두의 우석규 공의 거주하던 마을이 용연리 바로 앞의 삼감리이기 때문이며, 국도변에 세운 것은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에 두려는 뜻에서였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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