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도천동 854
백운서재는 고시완(高時浣) 선생이 가난한 집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다.
선생의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백운암(白雲菴)으로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선생은 고대관(高大觀)을 아버지로 해주 오씨(海州吳氏)를 어머니로 하여정조 7년(1783) 2월 22일에 태어났다.
형(兄) 시양(時瀁)과는 어릴적부터 우애가 지극했을뿐 아니라 면학에도 함께 열중하여 형제가 나란히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호방하여 학문에만 전념할 뿐 출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실학(實學)의 연구에 몰두하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일찍이 천암산(天岩山) 기슭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항상 바른 몸가짐으로 성의껏 가르치고 재물을 탐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바위틈에서 샘물을 끌어다가 앞뜰에 조그만 못을 만들고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아담한 정원을 만들었다.
못 속에서 노니는 고기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즐기면서 때로는 거문고로 산과 바다에 화답하고 혹은 붓을 들어 풍월을 노래하니 그 고아한 자태는 진실로 세속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기를 여러 해 하던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대인(大人)이 홀연히 나타나 반석에 걸터앉아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 성(誠)을 되돌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냇물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면서 깨달으니 이것이 진리대각(眞理大覺)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다시 책을 끌어당겨 학문 탐구에 매진하니 고금의 경서 연구에 걸림이 없고 진리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역대상도해(易大象圖解)] 상·하권과 [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 [몽대인기(夢大人記)] [혹인문답(惑人問答)]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수상문(隨想文)과 사실기록문(事實記錄文)도 여러 편이 있는데 모두 성리학
(性理學)을 굴림체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人性)을 논한 역작이었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시던 선생이 헌종 7년(1841) 12월 21일 향년 59세로 타계하시니 제자들이 태평동(현 인평동) 국재(局峙) 언덕에 유택을 마련하고 장례를 치렀다.
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 동추(同樞) 지희(志禧)의 따님인데 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강당 뒤 북쪽에 사우(祠宇)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옛날 향선생(鄕先生)이 돌아가시면 사(社)에서 제사 지내던 것을 본뜬 것이다.
선생의 문집이 여러 번 화재를 입어 몇 편밖에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
지금도 서재의 뜰에는 못과 대나무 등 옛모습이 일부 남아 있고 유림에서 매년 음력 8월의 하정일(下丁日)에 채례(菜禮)를 모시고 있다.
백운선생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런데 역(易)에 달통했던 고인들의 일화가 대개 그렇듯 신비적으로 채색되어 전설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통제영에서 군점행사를 벌이고 있던 어느 날, 서당의 학동들이 강구안과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수조(水操)를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백운선생은 학동들을 불러 앞뜰의 못 주위에 앉혀놓고 못가의 계수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훑어 못에 뿌리니 잎사귀 하나하나가 전선(戰船)으로 변하더니 대오를 지어 수조를 취하는 것이 일사불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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