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이 성은 고려 공민왕 때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崔瑩) 장군이 수많은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그후 이 성으로하여 왜구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1592년) 왜적에게 당포성이 점령당했으나 6월 2일 이충무공이 다시 탈환하였는데 이것이 당포승첩(唐浦勝捷)이다.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1934년에 간행된 ≪통영군지≫에 "산양면에 있으니 당포진의 옛터다. 둘레가 1,445척(약 676m)이고 높이가 13척(약 4m)인데 수군만호를 두어 지켰던 곳이다" 라고만 적혀 있다.
당포성은 평평한 자연할석(自然割石)을 일렬로 배열하여 기단석(基壇石)을 삼고 1자쯤 들여서 역시 자연할석으로 바깥벽을 수직으로 쌓아올리면서 안쪽으로는 바깥보다 작은 돌과 석심(石心)을 박은 흙을 다져 밋밋하게 쌓아 올린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성되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축진성(石築鎭城)의 전형으로 삼덕리 야산의 봉우리와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남향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이다.
남쪽 해안에 정문(正門)을 두고 산 쪽으로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을 두었으며 문에는 옹성(甕城)을 쌓았다.
동문과 서문의 좌우에 각각 1개의 치(雉)가 있고 남벽(南壁)에 4개의 치를 두어 모두 8개의 치가 있고 지금 남아 있는 석축은 최고높이 2.7m, 폭 4.5m이다.
남쪽 일부의 석축이 무너진 것을 제외하고 동서북쪽 망루의 터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문의 터에는 옹성(甕城)이 있었는데, 그 형태도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옛날 당포진에는 수군만호(萬戶 : 종4품 무관직)를 두었고, 만호는 전선 1척에 장교 6명, 사부(射夫) 18명, 화포(火砲) 10명, 포수(砲手) 24명, 타공(舵工) 4명, 격군(格軍) 126명에 군량미 44석 11두, 증미(蒸米) 10석, 미식(味食) 3석과 병선 1척에 장교 1명, 사부 10명, 포수 10명, 타공 1명, 격군 8명과 사후선(伺候船) 2척에 격군 각 9명 등 장졸 236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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