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무전동 377-1
시우쇠, 놋쇠, 백통 등을 써서 돌쩌기, 경첩, 문고리, 거멀쇠, 검잡이, 칠엽, 자물쇠 등을 만드는 장석은 통제영 당시 영내 12공방중 주석방(周錫房)에서 유래되었다.
두석장이라는 명칭은〈경국대전〉공조(工曺)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에서 연유한다.
두석이라는 용어는 옛 문헌에는 더러 나타나지만 오늘날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옛 문헌에서도 다소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에서는 두석이 황동이나 주석과 같은 말이라 하였고 황동은 적동과 왜연(倭鉛)의 합금인데 흔히 두석과 두석(斗錫:연성하지 않은 왜연)을 잘못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서종(五州書種)〉에서는 "중국에서는 왜연이라 하는 것과 일본에서의 아연(亞鉛)과 우리나라에서 합석(合錫)이라 부르는 것이 기실은 한 가지 물건"이라고 하였다. 또 〈현종실록〉에 의하면 함석을 섞어 두석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두석장은 놋쇠를 다루어 장석을 만드는 장인이었음에 틀림없으며 구리에 아연 30%를 합금해서 제품화하는 일종의 유장(鍮匠)에 속한다. 7:3의 합금비율은 쇠가 유연해서 일하기 좋지만 아연을 40%로 높이면 강해져서 주물밖에 하지 못한다.
구리에 석(錫)을 합금해서 단조하는 방짜도 없지 않았으나 놋쇠라 해도 방짜는 제작공정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까닭에 흔하게 쓰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근래 두석장의 주된 일은 백통을 다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백통은 구리에 니켈을 넣은 합금인데 은빛을 호상하는 시대풍조에 따라 백통일변도로 치우쳐 버려 놋쇠일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이와같은 백통장석의 풍조는 19세기 말부터 일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석장의 기능은 구리합금의 쇠가닥을 두드려 펴서 정으로 쪼고 줄로 쓸어 다듬는 수공과정으로 일관되었으나 최근에는 프레스로 찍어내어 기계생산도 하고 있다.
장석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주석장석, 철장석, 백동장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장석 재료를 넣은 도관을 불독 위에 놓고 풀무질로 녹여 이것을 골판에 부어 쇠까치를 만든다. 이것을 모래둑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서 0.5mm 정도의 판철로 늘려 깜칼로 면을 반듯하게 깍아내고 본을 대어 문양을 그려넣는다.
그린 문양은 작도와 징으로 오려서 가장자리를 줄로 다듬고 굽은 장석은 톰바위에 놓고 두들겨 곱치고 활비비로 구멍을 뚫고 정으로 문양을 새기고 사기분말을 걸레에 묻혀서 문질러 광택을 낸다.
지금은 공정이 까다롭지 않고 재료도 구하기 쉬운 스테인레스 등으로 만들지만 문양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장석은 역시 은(銀)으로 만들어야 한다. 장석은 주로 나전칠기나 소목공장의 주문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만 그들의 희망과 요구에 따라 종류, 도안, 문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현대감각에 맞는 장식류를 개발 제공하고 있다.
통영장석은 궁중에 진상했으며 장석의 문양은 각양각색으로 나비모양, 박쥐모양, 붕어모먕, 학모양, 아(亞)자모양 등이 있으며 앞받이, 경첩, 앞고리, 통귀, 관녕, 비각과 자물통으로는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타래쇠통, 네모회자쇠통 등이 있다.
두석장은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보유자 김덕용(金德龍 : 1996년 타계)은 어려서부터 부친인 김춘국(金春國)에게서 이 일을 배워왔고 기술전수를 받은 제자들이 각처에서 소규모로 활약하고 있다. 지금은 그의 아들 김극천이 선친의 뒤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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