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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지 - 조선후기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던 통제영지(統制營址)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번지 일원

조선후기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던 통제영을 복원·보전하기 위하여 통제영지(統制營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에 있는 통제영시대의 객사(客舍) 세병관을 중심으로 주위의 통영초등학교(9필지, 1만3,199㎡), 구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5,745㎡), 충렬여상·충렬여중학교(5필지, 9,846㎡), 통영세무서(1,782㎡)와 현 세병관 경역을 포함하는 총29필지, 4만1,022㎡ (1만2,409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통영시는 앞으로 관아 30여동과 12공방을 이곳에 복원할 예정이다.

지정구역내 관청과 학교의 이전에 맞추어 법원·검찰청사 터에는 운주당 (運籌堂)·경무당(景武堂)·내아(內衙)·병고(兵庫) 등을 복원하고 통영초 등학교 부지에는 백화당(百和堂)과 12공방(工房) 등을, 통영세무서 자리에 는 중영(中營)·중영내아(中營內衙)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약 300년 동안 삼남(三南)을 호령하던 남해의 관방(關防) 통제영의 위용을 재현함으로써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명미한 자연풍광과 함께 어우러지게 통영의 면모를 가다듬고 21세기를 향한 웅비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패하던 육군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職銜)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니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 37년(1604) 9월 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포(頭龍浦)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선조 38년(1605)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官衙)를 지으니 통영은 이렇게 조선조 유일한 [계획군사도시]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후 숙종 4년(1678) 윤천뢰(尹天賚) 제57대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높이 1장반(약 4.6m), 둘레 1만1,730자(약 3.6km),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개의 관아가 통제영의 위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성곽과 관아가 다 헐리고 지금은 통영성의 일부와 세병관이 겨우 남아 지난날의 영광을 쓸쓸하게 증언해줄 뿐이다.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통제영지가 계획대로 복원되면 이는 통영시민의 긍지를 드높이는 [호국의 성지]·[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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