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
이 문서는 광해군 5년(1613) 위성공신 3등에 책훈된 한성좌윤 유몽인에게 내려진 교서로 원명은 '교갈충진성위성공신가의대부한성부좌윤영양군유몽인서'이다. 위성공신이란 임진왜란 때 왕제자 광해군을 호종, 분조를 호위하고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 하여 훈적에 올린 신료들을 만한다. 1등에는 최흥원 등 10명을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 3등에는 유몽인 등 53명에게 '갈충진성위성공신'이란 공신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의하면, 3등 공신인 유몽인에게 본인은 물론 그의 부모처자에게도 일계가 가자되었을 뿐 아니라 조비·전결·은자·기마·표리 등이 아울러 사급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관련인물인 유몽인(1559,명종14~1623,인조 1)은 『어유야담』 의 저자로서 조선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자를 응문, 호를 어우당 또는 양재, 본관은 고흥이다. 사간을 지낸 충관의 손자이며 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임란 직전에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왜란 발발 직후에 돌아와 의주 행궁에서 복명한 후 세자시강원 사서로 있으면 서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다. 난후에 황해도 감사, 한성부 좌윤, 승정원 도승지, 예조판사등을 지냈다.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 는 관계로 인조반정 당시 화를 면하였으나 곧 바로 유응시 등 반대파의 고변에 의해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정조 때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고흥 운곡사에 배향되었으며 의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 문서는 임란 직후에 시행된 조정의 반급문서로서 당시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 및 그 사례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문서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이 있어서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이 문서는 광해군 5년(1613) 위성공신 3등에 책훈된 한성좌윤 유몽인에게 내려진 교서로 원명은 '교갈충진성위성공신가의대부한성부좌윤영양군유몽인서'이다. 위성공신이란 임진왜란 때 왕제자 광해군을 호종, 분조를 호위하고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 하여 훈적에 올린 신료들을 만한다. 1등에는 최흥원 등 10명을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 3등에는 유몽인 등 53명에게 '갈충진성위성공신'이란 공신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의하면, 3등 공신인 유몽인에게 본인은 물론 그의 부모처자에게도 일계가 가자되었을 뿐 아니라 조비·전결·은자·기마·표리 등이 아울러 사급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관련인물인 유몽인(1559,명종14~1623,인조 1)은 『어유야담』 의 저자로서 조선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자를 응문, 호를 어우당 또는 양재, 본관은 고흥이다. 사간을 지낸 충관의 손자이며 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임란 직전에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왜란 발발 직후에 돌아와 의주 행궁에서 복명한 후 세자시강원 사서로 있으면 서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다. 난후에 황해도 감사, 한성부 좌윤, 승정원 도승지, 예조판사등을 지냈다.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 는 관계로 인조반정 당시 화를 면하였으나 곧 바로 유응시 등 반대파의 고변에 의해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정조 때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고흥 운곡사에 배향되었으며 의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 문서는 임란 직후에 시행된 조정의 반급문서로서 당시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 및 그 사례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문서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이 있어서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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