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574
이 범종은 정혀인 상대와 하대가 있고 중앙 윗 부분에 4개의 유곽고 유곽내에 각각 9개의 유두를 표출하였다. 세부를 보면 하대로 굵은 두줄의 횡선을 두고 그 안으로 두마리의 용을 양각하여 발격형을 하였으며 사과의 발톱과 용구에서 불을 내뿜는 화염문이 각출되었다. 종신 중앙부에는 요형의 사각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사월일창평현용귀사신주종기…」라는 명문이 표기되었는데 행서종행으로 총 38행 255자가 새겨졌다. 이 명문에 의하면 종의 조성년대는 인조 22년(1644)임을 알 수 있다. 종신중앙 상잔으로는 네군데 유곽에 9개의 유두와 인동당초문으로 그 외곽을 장식하였다 유곽사이로는 전후좌우로 두광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겨 종신의 장식성을 나타냈다. 상대로는 두줄의 횡선에 범 자를 양각를 양각했으며 「육자대면왕진언」이라 명문하였다. 상부의 용두는 대개의 경우 하나리의 용이 허리를 구부려 그 중심부에 고리를 걸도록 하고 그 뒤로 음관(용통)을 세우고 다음 용 미를 조각한데 반해 이 범종에서는 이러한 통례와는 달리 4마리 의 용이 서로 얽혀 고리에 걸도록 되었으며 음관은 생략하였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의 범종이 대개의 경우 임진 이후 것인데 이 종은 임란 이후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속하여 태안사 천순명동 종과 함께 매우 귀중한 예라 할 것이다. 용흥사는 담양읍에서 북으로 8km쯤 가다 왼쪽으로 다시 4km쯤 산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대왕의 어머니인 창평인 최복순 여인이 이 절에 서 기도를 하여 영조대왕을 낳고 이 절 이름을 용흥사라 하고 산 이름도 용귀산에서 몽성산이라 고쳤다고 한다. 용흥사는 현 건물 지의 규모로 보아 옛날에는 대규모의 사찰이었던 것 같으나 6· 25동란시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사된 상태이다.
이 범종은 정혀인 상대와 하대가 있고 중앙 윗 부분에 4개의 유곽고 유곽내에 각각 9개의 유두를 표출하였다. 세부를 보면 하대로 굵은 두줄의 횡선을 두고 그 안으로 두마리의 용을 양각하여 발격형을 하였으며 사과의 발톱과 용구에서 불을 내뿜는 화염문이 각출되었다. 종신 중앙부에는 요형의 사각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사월일창평현용귀사신주종기…」라는 명문이 표기되었는데 행서종행으로 총 38행 255자가 새겨졌다. 이 명문에 의하면 종의 조성년대는 인조 22년(1644)임을 알 수 있다. 종신중앙 상잔으로는 네군데 유곽에 9개의 유두와 인동당초문으로 그 외곽을 장식하였다 유곽사이로는 전후좌우로 두광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겨 종신의 장식성을 나타냈다. 상대로는 두줄의 횡선에 범 자를 양각를 양각했으며 「육자대면왕진언」이라 명문하였다. 상부의 용두는 대개의 경우 하나리의 용이 허리를 구부려 그 중심부에 고리를 걸도록 하고 그 뒤로 음관(용통)을 세우고 다음 용 미를 조각한데 반해 이 범종에서는 이러한 통례와는 달리 4마리 의 용이 서로 얽혀 고리에 걸도록 되었으며 음관은 생략하였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의 범종이 대개의 경우 임진 이후 것인데 이 종은 임란 이후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속하여 태안사 천순명동 종과 함께 매우 귀중한 예라 할 것이다. 용흥사는 담양읍에서 북으로 8km쯤 가다 왼쪽으로 다시 4km쯤 산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대왕의 어머니인 창평인 최복순 여인이 이 절에 서 기도를 하여 영조대왕을 낳고 이 절 이름을 용흥사라 하고 산 이름도 용귀산에서 몽성산이라 고쳤다고 한다. 용흥사는 현 건물 지의 규모로 보아 옛날에는 대규모의 사찰이었던 것 같으나 6· 25동란시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사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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