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393
영광 향교는 향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315~1374)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게 전해진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신숙주의 객관기에 의하면 본읍은 왜적의 침입으로 세조 2년(1456) 성산아래로 옮긴 후 동왕 11년(1506) 봄에 관사의 준공을 보았다는 내용이 보이므로 본향교의 창건도 이 무렵에 같이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선조 때 중훈대부인 죽곡 이장영의 향교중수기에 또한 이와 같은 내력을 적고 있으니 그 연혁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서제가 있고 동무·서무 그리고 외삼문 등이 있다. 원래는 향교입구에 만화루가 있었으나 근년에 소실되고 나서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삼간, 측면 이간, 맞배지붕으로 기단은 3단의 장대석으로 짜고 초석은 방형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둥근 원주를 사용하였다. 전면은 전퇴를 한 결구인데 기둥위로 창 방만 걸치고 각 기둥위로는 포작없이 보아지와 장설로 결구 되었는데 장여 도리가 연결되고 있다. 내부는 평고주 오량가 로 천장은 연동천장이고 창호는 3간 모두 판문이며 태극문을 칠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부연이 있고 지붕 양편에 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인데 양퇴간은 후대 에 보수하면서 변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막돌 바른 층 쌓기로 나직하고 그 위로 덤벙초석과 기둥은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위로는 포작없이 바로 민가 형태로 되었으며 처마 는 홑처마이다. 창호는 5간 모두 2분합으로 띠살문이다. 이 향교의 건물은 대성전이 앞에 나오고 그 뒷 편에 명륜당과 동·서제가 배치되는 특이한 형식으로 현재 서제는 복원되지 않고 있다. 향교에서 전하는 말로는 서울 성균관이 정종 2년 (1400)에 화재로 소실되자 태종 7년(1407)에 이를 복원하면서 본 향교를 참고하였다 한다. 영광읍은 당시 옥당 고을로 유 생 70명과 예사 2명을 두었으며 도호부에 해당되는 향교라 전해진고 있다.
영광 향교는 향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315~1374)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게 전해진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신숙주의 객관기에 의하면 본읍은 왜적의 침입으로 세조 2년(1456) 성산아래로 옮긴 후 동왕 11년(1506) 봄에 관사의 준공을 보았다는 내용이 보이므로 본향교의 창건도 이 무렵에 같이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선조 때 중훈대부인 죽곡 이장영의 향교중수기에 또한 이와 같은 내력을 적고 있으니 그 연혁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서제가 있고 동무·서무 그리고 외삼문 등이 있다. 원래는 향교입구에 만화루가 있었으나 근년에 소실되고 나서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삼간, 측면 이간, 맞배지붕으로 기단은 3단의 장대석으로 짜고 초석은 방형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둥근 원주를 사용하였다. 전면은 전퇴를 한 결구인데 기둥위로 창 방만 걸치고 각 기둥위로는 포작없이 보아지와 장설로 결구 되었는데 장여 도리가 연결되고 있다. 내부는 평고주 오량가 로 천장은 연동천장이고 창호는 3간 모두 판문이며 태극문을 칠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부연이 있고 지붕 양편에 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인데 양퇴간은 후대 에 보수하면서 변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막돌 바른 층 쌓기로 나직하고 그 위로 덤벙초석과 기둥은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위로는 포작없이 바로 민가 형태로 되었으며 처마 는 홑처마이다. 창호는 5간 모두 2분합으로 띠살문이다. 이 향교의 건물은 대성전이 앞에 나오고 그 뒷 편에 명륜당과 동·서제가 배치되는 특이한 형식으로 현재 서제는 복원되지 않고 있다. 향교에서 전하는 말로는 서울 성균관이 정종 2년 (1400)에 화재로 소실되자 태종 7년(1407)에 이를 복원하면서 본 향교를 참고하였다 한다. 영광읍은 당시 옥당 고을로 유 생 70명과 예사 2명을 두었으며 도호부에 해당되는 향교라 전해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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