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6
이 비는 도갑사 대웅전 뒷 편 좌측(향우) 빈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북향을 하고 있다. 비의 양식을 보면 방형의 좌대 위에 귀부를 앉히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올리는 통식을 따랐다. 가로 160cm, 세로 175cm 되는 방형좌대와 귀부가 1석으로 서있으며 귀두는 용 두화 되어 용맹스런 눈망울이 인상적이고 입에는 여의주를 머금은 이빨이 돋보인다. 고개는 짧은 편이고 앞발은 약간 벌려서 팔자형으로 나왔는데 발톱은 5과이다. 뒷발은 이와 대조적으로 양옆으로 뻗쳐있고 역시 발톱은 5과이다. 귀갑은 통식인 육각문이나 중첩되었으며 귀부의 양편으로 선각되어 있다. 비신 전면 상단에는「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 전서(글자 직경 13.5cm)하였고 내용은 모두 19행 해서체이다. 비문 맨 끝에「숭정기사이월일 시계유유월일립」이라 하여 이 비가 인조 7년 즉 1629년에 시작하여 그 4년후인 인조 11 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글씨는 백암 성총이 짓고 썼으며 비신 뒷 편은 당시비 건립에 참여했던 지방인사 및 승 려 이름등 시주질이 명기되어 있다. 이수는 흔히 조선시대에 보이는 팔작지붕형이 아닌 방형으로 이수 네모서리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몸둥아리는 서로 반결하 여 허공을 날아 비약하는 모습이다. 전면 중앙으로는 한 쌍 의 용을 새겨서로 입을 접근시켜 혀를 맞대고 있는 재미있는 기법을 보여 주고있다. 수미왕사는 호가 묘각이며 영암 출신이다. 13셍 도갑사에서 낙발하고 뒤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대사와 더불어 경율론 3장을 깊이 연구하였다. 후에 선종판사가 되고 고향인 도갑 사에 돌아와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세조때에는 왕사로 봉해졌다. 이 비는 조선시대의 다른 비보다는 그 연대가 앞서고 있으 며, 귀부도 다소 힘이 빠진 기법이긴 하나 선대의 솜씨를 그 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비는 도갑사 대웅전 뒷 편 좌측(향우) 빈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북향을 하고 있다. 비의 양식을 보면 방형의 좌대 위에 귀부를 앉히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올리는 통식을 따랐다. 가로 160cm, 세로 175cm 되는 방형좌대와 귀부가 1석으로 서있으며 귀두는 용 두화 되어 용맹스런 눈망울이 인상적이고 입에는 여의주를 머금은 이빨이 돋보인다. 고개는 짧은 편이고 앞발은 약간 벌려서 팔자형으로 나왔는데 발톱은 5과이다. 뒷발은 이와 대조적으로 양옆으로 뻗쳐있고 역시 발톱은 5과이다. 귀갑은 통식인 육각문이나 중첩되었으며 귀부의 양편으로 선각되어 있다. 비신 전면 상단에는「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 전서(글자 직경 13.5cm)하였고 내용은 모두 19행 해서체이다. 비문 맨 끝에「숭정기사이월일 시계유유월일립」이라 하여 이 비가 인조 7년 즉 1629년에 시작하여 그 4년후인 인조 11 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글씨는 백암 성총이 짓고 썼으며 비신 뒷 편은 당시비 건립에 참여했던 지방인사 및 승 려 이름등 시주질이 명기되어 있다. 이수는 흔히 조선시대에 보이는 팔작지붕형이 아닌 방형으로 이수 네모서리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몸둥아리는 서로 반결하 여 허공을 날아 비약하는 모습이다. 전면 중앙으로는 한 쌍 의 용을 새겨서로 입을 접근시켜 혀를 맞대고 있는 재미있는 기법을 보여 주고있다. 수미왕사는 호가 묘각이며 영암 출신이다. 13셍 도갑사에서 낙발하고 뒤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대사와 더불어 경율론 3장을 깊이 연구하였다. 후에 선종판사가 되고 고향인 도갑 사에 돌아와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세조때에는 왕사로 봉해졌다. 이 비는 조선시대의 다른 비보다는 그 연대가 앞서고 있으 며, 귀부도 다소 힘이 빠진 기법이긴 하나 선대의 솜씨를 그 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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