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이수 아래의 재액에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 수미비」라 전서하였고 비제는 「월출산 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존」이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찬하고 그씨는 예조판서겸 호문관대제학인 오준이 썼으며 전액은 형조판서인 김광욱이 썼다. 자경 4cm에 16행으로 비석 전면과 추면에 음각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 세워져 있던 도선국사의 석비귀부가 떨어져 나갔고 비신은 풍마로 인하여 허물어져 다시금 세운다는 내용이다. 비문에「국사법휘도선 신라랑주인야 모왈최씨 가정성기산지벽촌 생어진덕왕지계세……」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불교통사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진덕여왕보다 훨씬 후대인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나 효공왕 2년(898)에 입적한 고승으로 이 고장 영암에서 출 생, 성은 김씨이며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낙발하고 광양 옥룡사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했다. 또 수미대사는 조선조 초기 고 승으로 호는 묘각이며 성은 최씨로 낭주출신이고 13세에 도갑사 에서 삭발한 후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법주사에서 신미와 함께 수도하면서 후에 선종판사가 되어 서기1458년 세조의 명을 받아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박아내기도 했다. 귀부의 두부는 자연스럽게 약간 오른편을 항하고 여의주를 물었다. 여기서 귀두의 목이 직립하지 않은 것은 조선조 석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례이다. 또한 귀부이 문양은 선명정연하나 통례 의 육각문이 아니고 파상평행선이 특이하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쌍룡이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매우 강한 사실성을 보였고 더구나 그의 힘은 이수에서 한층 승화되어 반결요법의 조법으로 극치를 나타냈다.
이수 아래의 재액에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 수미비」라 전서하였고 비제는 「월출산 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존」이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찬하고 그씨는 예조판서겸 호문관대제학인 오준이 썼으며 전액은 형조판서인 김광욱이 썼다. 자경 4cm에 16행으로 비석 전면과 추면에 음각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 세워져 있던 도선국사의 석비귀부가 떨어져 나갔고 비신은 풍마로 인하여 허물어져 다시금 세운다는 내용이다. 비문에「국사법휘도선 신라랑주인야 모왈최씨 가정성기산지벽촌 생어진덕왕지계세……」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불교통사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진덕여왕보다 훨씬 후대인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나 효공왕 2년(898)에 입적한 고승으로 이 고장 영암에서 출 생, 성은 김씨이며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낙발하고 광양 옥룡사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했다. 또 수미대사는 조선조 초기 고 승으로 호는 묘각이며 성은 최씨로 낭주출신이고 13세에 도갑사 에서 삭발한 후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법주사에서 신미와 함께 수도하면서 후에 선종판사가 되어 서기1458년 세조의 명을 받아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박아내기도 했다. 귀부의 두부는 자연스럽게 약간 오른편을 항하고 여의주를 물었다. 여기서 귀두의 목이 직립하지 않은 것은 조선조 석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례이다. 또한 귀부이 문양은 선명정연하나 통례 의 육각문이 아니고 파상평행선이 특이하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쌍룡이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매우 강한 사실성을 보였고 더구나 그의 힘은 이수에서 한층 승화되어 반결요법의 조법으로 극치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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