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해남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1592년(선조 25) 왜란을 맞아 선조의 특명을 받아 제자인 유정·처영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여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입적한 뒤, 그의 의발을 모셨던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0여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에는 대흥사의 천묵·계홍스님이 서산대사와 유정·허영을 모시고 사우건립을 모색하여 이듬해에는 사우건립의 허가와 함께 '표충'이라는 사액을 받게된다.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당위성을 왕에게 상세히 주청한 결과였다. 조정에서는 사액과 함께 예조정랑 정기환을 예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후 1794년(정조 18)에 정조는 표충사에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지는 것을 계기로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직접 써서 대흥사에 내려 내었다. 「정종대왕신장」이라는 표시가 있는 이 유물은 화운문채화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내용이 적혀 있다. 말미에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인이 있고, 글의 내용은 서산대사 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이다(175.5cm× 69.8cm). 이 화상당명 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 내용을 후대인들이 다시 써서 보관중인 금자병풍과 현판문이 있다. '금자병풍서'는 원래 6폭(65cm×120cm, 자경 3.5cm)으로 좌 우 1폭씩은 해전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본문금니서 는 중간 4폭이며 필자는 누군지 않수가 없다. 현판은 표충사 좌우벽에 걸려 있으며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이서구(1754~1852)가 썼다.
해남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1592년(선조 25) 왜란을 맞아 선조의 특명을 받아 제자인 유정·처영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여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입적한 뒤, 그의 의발을 모셨던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0여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에는 대흥사의 천묵·계홍스님이 서산대사와 유정·허영을 모시고 사우건립을 모색하여 이듬해에는 사우건립의 허가와 함께 '표충'이라는 사액을 받게된다.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당위성을 왕에게 상세히 주청한 결과였다. 조정에서는 사액과 함께 예조정랑 정기환을 예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후 1794년(정조 18)에 정조는 표충사에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지는 것을 계기로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직접 써서 대흥사에 내려 내었다. 「정종대왕신장」이라는 표시가 있는 이 유물은 화운문채화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내용이 적혀 있다. 말미에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인이 있고, 글의 내용은 서산대사 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이다(175.5cm× 69.8cm). 이 화상당명 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 내용을 후대인들이 다시 써서 보관중인 금자병풍과 현판문이 있다. '금자병풍서'는 원래 6폭(65cm×120cm, 자경 3.5cm)으로 좌 우 1폭씩은 해전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본문금니서 는 중간 4폭이며 필자는 누군지 않수가 없다. 현판은 표충사 좌우벽에 걸려 있으며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이서구(1754~1852)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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