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나주목의 객사(客舍) 건물이다. 객사란 고려.조선때 지방 官廳舍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 보름때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翼廊에서 留宿하게 하던 곳이다.
조정에서 제정한 율령이 각 지방에서 반포되는 장소이기도 해서 장날인 2일과 7일에 백성들이 모여서 방을 보고 반포된 율령의 내용을 알아보았던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때 의병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고, 명성왕후가 일본인 낭인들의 손에 시해되었을 때 빈소를 마련하여 항일정신을 고조시킨 곳이기도 하다
초창(初創)은 성종 18∼20년(1487. 4.12 ∼1489. 7)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하였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重修하였고 1884∼1886년 사이에 박규동(朴奎東)목사가 중수하였다.
금성관은 현재는 사라진 동익과 서익을 제외하고도 전국의 객사 건물중 가장 큰 97평이다. 일제시대에는 창호마루등 건물의 내부를 개조하여 군청사(郡廳舍)로 사용되었다. 그후 1963년 9월에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다가 1976년 9. 10 ∼ 1977년 6. 30일 완전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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