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493
≪우득록≫은 조선 중기 호남사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인재 정개청(1529~1590)의 문집으로 수차에 걸친 당화를 입으면서도 어렵게 보존되어진 귀중한 자료이다. 인재 정개청의 자는 의백, 호는 인재, 고성인으로 1529년(중 종 24)에 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보성의 영주산사에서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의약·복서 등의 잡학에 힘써 강구하여 인재라 자호하였다. 그 후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사암 박순과의 교육를 통해 학문이 폭과 깊이를 더하였으며, 1565년경에 함편군 암다면 제동 마을로 귀향하여 향리에서 후생들을 양성하면서 이른바 1589(선조 22)년 [기축옥]이라 불리우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될 때 까지 20 여년간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 문인들로는 나덕준·나덕윤 등의 나주 나씨일가와 나덕원 ·안중묵·최홍주·송제민·정제·유양·정인·윤제·정지성 이 꼽히는데 이들은 후일 정개청의 신원이나 서원 건립(제동 사 자산서원)등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인재를 배향한 자산서원(1616년 창건)은 5차에 걸친 복 설과 훼철을 거듭하는, 실로 호남사림계의 각축 혹은 당화의 생생한 자취를 남긴 유적이며, 인재의 저서로는 ≪우서록≫ 3권과 ≪수수기≫ 9권뿐이나, 그나마 ≪수수기≫는 피체되었을 당시에 압수되었다가 분실되고 ≪우득록≫만이 유일한 저술로 남아 있다. ≪우득록≫은 총 4책(총 334편의 글이 실려있는 본편 3책, 부 록 상·하 1팩)으로 1~2권은 성리제설과 강의계서가 수록되 어 있고, 3권에는 소답·서·제·문이 실려 있다. 서문은 미수 허목이 1681년(숙종 7)에 지은 것이고, 부록은 상권에 인재의 세계와 사실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인재행장, 인재 전(허목 찬)이 실려 있다. ≪우득록≫의 각판작업은 인재의 필초본이 숙종에게 보여져 1689년 왕의 특명으로 시작되어 1692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부록은 1703년에 이뤄졌다. 현존하는 ≪우득록≫ 각판의 수는 모두 48판에 불과하여 원래의 총 판수(108매)의 반수 정도만 보존되어 있다. 인재 정개청은 관력이나 저술의 면에서는 쉽게 부각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나 문인들의 활동은 바로 당대 호남 사림의 인맥이나 동향을 검토·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우득록≫은 조선 중기 호남사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인재 정개청(1529~1590)의 문집으로 수차에 걸친 당화를 입으면서도 어렵게 보존되어진 귀중한 자료이다. 인재 정개청의 자는 의백, 호는 인재, 고성인으로 1529년(중 종 24)에 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보성의 영주산사에서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의약·복서 등의 잡학에 힘써 강구하여 인재라 자호하였다. 그 후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사암 박순과의 교육를 통해 학문이 폭과 깊이를 더하였으며, 1565년경에 함편군 암다면 제동 마을로 귀향하여 향리에서 후생들을 양성하면서 이른바 1589(선조 22)년 [기축옥]이라 불리우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될 때 까지 20 여년간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 문인들로는 나덕준·나덕윤 등의 나주 나씨일가와 나덕원 ·안중묵·최홍주·송제민·정제·유양·정인·윤제·정지성 이 꼽히는데 이들은 후일 정개청의 신원이나 서원 건립(제동 사 자산서원)등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인재를 배향한 자산서원(1616년 창건)은 5차에 걸친 복 설과 훼철을 거듭하는, 실로 호남사림계의 각축 혹은 당화의 생생한 자취를 남긴 유적이며, 인재의 저서로는 ≪우서록≫ 3권과 ≪수수기≫ 9권뿐이나, 그나마 ≪수수기≫는 피체되었을 당시에 압수되었다가 분실되고 ≪우득록≫만이 유일한 저술로 남아 있다. ≪우득록≫은 총 4책(총 334편의 글이 실려있는 본편 3책, 부 록 상·하 1팩)으로 1~2권은 성리제설과 강의계서가 수록되 어 있고, 3권에는 소답·서·제·문이 실려 있다. 서문은 미수 허목이 1681년(숙종 7)에 지은 것이고, 부록은 상권에 인재의 세계와 사실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인재행장, 인재 전(허목 찬)이 실려 있다. ≪우득록≫의 각판작업은 인재의 필초본이 숙종에게 보여져 1689년 왕의 특명으로 시작되어 1692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부록은 1703년에 이뤄졌다. 현존하는 ≪우득록≫ 각판의 수는 모두 48판에 불과하여 원래의 총 판수(108매)의 반수 정도만 보존되어 있다. 인재 정개청은 관력이나 저술의 면에서는 쉽게 부각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나 문인들의 활동은 바로 당대 호남 사림의 인맥이나 동향을 검토·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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