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산 229-1
이 산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 朝鮮 > 숙종< 肅宗 > 35년(1709)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 윤숙< 尹淑 >이 병영을 건설코자 4문의 기초공사를 시작하고, 성벽축조를 위한 석재를 모으며, 수구문< 水口門 >을 축조하던 중 때마침 거듭되는 흉년과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중지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북문과 수구문 터는 축성을 시작하여 공사하던 옛모습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朝鮮時代 > 축성< 築城 >의 기법과 공사의 순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북문터의 부분이 전체의 성터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안팎의 아치문을 무사석< 武砂石 >과 부형< 缶形 > 무사석으로 만든 수법과, 내외겹축< 內外夾築 >의 성벽을 내탁< 內托 >의 방법을 이용하려 하였던 모습을 보여준다. 수구문터는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한 2층수구< 二層水口 >로 축조하려던 모습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 朝鮮 > 숙종< 肅宗 > 35년(1709)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 윤숙< 尹淑 >이 병영을 건설코자 4문의 기초공사를 시작하고, 성벽축조를 위한 석재를 모으며, 수구문< 水口門 >을 축조하던 중 때마침 거듭되는 흉년과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중지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북문과 수구문 터는 축성을 시작하여 공사하던 옛모습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朝鮮時代 > 축성< 築城 >의 기법과 공사의 순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북문터의 부분이 전체의 성터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안팎의 아치문을 무사석< 武砂石 >과 부형< 缶形 > 무사석으로 만든 수법과, 내외겹축< 內外夾築 >의 성벽을 내탁< 內托 >의 방법을 이용하려 하였던 모습을 보여준다. 수구문터는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한 2층수구< 二層水口 >로 축조하려던 모습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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