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
학보당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한 서재이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양팽손이 중종 16년(1521)때 건립한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은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지고, 1920년 그 후손들이 현 위치에 원형대로 복구 중건한 것이다. 그리고 85평이 넘는 그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측되는 노거수 은행목 한 그루가 살아 남아 있다. 양팽손은 성종 11년(1480) 학포당이 위치한 현재의 이양면 쌍봉리에서 이하의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 1년(1545) 같은 곳에서 서거했다. 자는 대춘, 호는 학포, 본관은 제주다. 어려서부터 특히 문장에 능하였고, 13세 때 송흠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 중종 5년(1510)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 동 11 년(1516) 시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조광조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했고, 중종 14년(1519)에 교리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사직당했다. 중종 16년(1521) 안당 일파를 사 사하는 사화가 또 발생하자 은거의 뜻을 굳히고 학포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에 대한 강학과 시화로 소일하였으며 중종 32 년(1537)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관되어 중종 39년(1544)에 용 담현령을 지내다 사직했다. 서화에 능하였으며 특히 그의 산수화는 호남 화단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능주의 죽림서원에 제향도었으며, 혜강의 시호를 받았다. 유저로 『학포유집』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
학보당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한 서재이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양팽손이 중종 16년(1521)때 건립한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은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지고, 1920년 그 후손들이 현 위치에 원형대로 복구 중건한 것이다. 그리고 85평이 넘는 그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측되는 노거수 은행목 한 그루가 살아 남아 있다. 양팽손은 성종 11년(1480) 학포당이 위치한 현재의 이양면 쌍봉리에서 이하의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 1년(1545) 같은 곳에서 서거했다. 자는 대춘, 호는 학포, 본관은 제주다. 어려서부터 특히 문장에 능하였고, 13세 때 송흠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 중종 5년(1510)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 동 11 년(1516) 시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조광조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했고, 중종 14년(1519)에 교리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사직당했다. 중종 16년(1521) 안당 일파를 사 사하는 사화가 또 발생하자 은거의 뜻을 굳히고 학포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에 대한 강학과 시화로 소일하였으며 중종 32 년(1537)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관되어 중종 39년(1544)에 용 담현령을 지내다 사직했다. 서화에 능하였으며 특히 그의 산수화는 호남 화단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능주의 죽림서원에 제향도었으며, 혜강의 시호를 받았다. 유저로 『학포유집』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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